[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5 (64)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5 (64)
  • 경남일보
  • 승인 2016.01.10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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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김지원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5 (64)

지난 일을 조목조목 되새겨 보면 기회를 놓친 게 한 둘 아니었다. 있는 힘도 쓰지 않았다. 더 크고 확실한 당처가 있을 것 같은 막연한 기대감에 사로잡혀 필요한 때마다 자린고비 지갑 움켜쥐듯 헐어 쓰기를 망설이고만 있었다. 도대체 그 대단하게 큰일이 무엇인지에 대한 확실한 구체성도 그려놓지 못한 채 말이다.

노크 소리가 났다. 번쩍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직 화장실 안이었다.

“뭐하는 거야. 안에 있어?”

기다리다 못한 현태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화장실 밖에서 불렀다. 오금이 딱 붙어서 다리가 떨어지지 않았다. 현태 씨 못 일어나겠어. 나 좀 일으켜 줘. 양지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반응이 없자 다시 노크를 하더니 발소리가 멀어졌다. 아주머니 이쪽으로 출구가 또 있어요? 저쪽에서 현태의 목소리가 들리고, 없는데요, 하는 주인여자의 대답과 발걸음 소리가 다가왔지만 양지는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안으로 잠겼어요. 참 급하기도 하시네, 조금만 기다려 보시죠. 달캉달캉, 잠긴 문을 끌어 당겨 보던 주인여자가 웃음기 밴 음성으로 말하고는 주방 쪽으로 멀어졌다.

이성의 지나친 친절은 성의 욕구와 직결된다던 누군가의 말이 왈칵 양지의 혐오감을 일깨웠다. 속을 보이면 더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코너에 밀려 쓰러지고 말 것 같은 두려움이 일었다. 아직은 유보하는 것, 그게 가장 넉넉하고 유리하게 선택의 여지를 소유할 수 있는 방법일 터였다.

양지는 화장실에서 나서며 일부러 남자처럼 거친 소리를 지어 항의를 했다.

“참 이상하네. 남 볼일도 마음 놓고 못 보게”

“난 또 기절이라도 해서 쓰러져 있는 줄 알았잖소”

무슨 엉뚱한 상상이라도 했지 싶게 큭큭 웃으며 현태가 먼저 자리에 앉았다. 식탁에는 이미 식사가 날라져 있었다.

“자, 어서 먹자. 다 식었어”

수저통에서 종이에 싸인 젓가락을 꺼내서 벗겨 주며 현태가 권했다. 그는 아무래도 아버지 세대와는 차이가 나겠지, 그럴 거야. 뚝배기에 담긴 찌개를 숟가락으로 휘저으며 양념을 넣고 건너편에서 왔다갔다 음식의 간을 맞춰주고 있는 현태의 손을 바라보았다. 그리곤 갑자기 배고픔을 의식한 것 마냥 수저질을 해서 또 아버지와 현태를 동일시하고 있는 자신의 상념을 털어 냈다.

저녁을 먹여 현태를 돌려보내려던 양지의 뜻은 다시 실패로 돌아갔다. 대강 식사가 끝나자 현태가 선수를 쳤다.

“지갑에 든 거 다 내놔. 가다가 유아복, 참 배내옷이라고 하던가, 그것도 한 벌 사야지. 정남인들 무슨 잘못이며 어린애는 또 무슨 죄야? 우리만이라도 산모와 어린 생명을 기껍게 환영해 주자구. 아무래도 우리보단 재주가 좋잖아?”

농담을 슬쩍 곁들이며 현태가 건너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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