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6 (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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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를 마치고 나니 햇살이 반쯤 책상머리를 차고 앉아있었다. 한 장 밖에 안남은 달력. 양지는 벽에 걸린 달력을 바라보며 햇볕에 묻힌 손을 내려다본다. 목덜미의 피부를 파고드는 햇살이 제법 따끈거린다. 유리 그림자를 밟으며 부지런히 블라인드를 내리고 있는 하양의 모습이 보인다. 양지는 커피 한 잔을 타서 들고 창가로 갔다. 여긴 그냥 둬. 손짓으로 하양의 접근을 밀어내며 삐죽 틔어 나온 기둥 모서리에 어깨를 기대고 섰다. 저만큼, 동남으로 훤히 뚫린 마당에도 햇살이 가득 반짝인다. 멈춰있던 화물차가 꼬리를 감추고 차단기를 올린 수위 부영감이 서성거리듯 천천히 수위실 쪽으로 가며 어디서 건강체조라도 배웠는지 깨금질 하듯이 떼는 발걸음에 따라 오른 팔 왼 팔을 어긋지게 흔들어 댄다. 남의 행동을 본인 모르게 훔쳐보는 것은 참 재미있다. 누군가 엿보고 있는 것을 안다면 저렇게 천연스럽지는 못하겠지. 쑥스러워할 영감의 모습을 상상하자 슬몃 미소가 번져 나왔다.
양지는 무연한 시선을 지어 컵 속의 검은 액체를 읽는다. 손의 미세한 흔들림에 따라 수많은 고리가 작고 검은 원심에서 파문을 일으키며 피어난다. 사라진다. 이 한 잔의 커피를 마시기 위해 나는 이 순간을 살고 있다. 삶의 의미부여를 극단순화 시켜 본다. 하지만 의식의 밑동은 그렇게 단순하지를 않다. 삶이라는 것, 생활이라는 것, 먹는 것 입는 것에 기초를 두고 쌓아 올리고 분식하는 지위와 명예, 품격 따위-. 그러나 따지고 보면 그런 것들은 관계를 떠나면 의미 없는 것이고 아주 사소한 것이며 지엽적이고 표피적일 뿐이다.
양지는 사람이 살아가는 이유를 한풀이의 실현이라고 하던 누군가의 말을 떠올려 본다. 한은 뿌리가 깊으며 끈질긴 줄기를 가진 의식의 산물이다. 그리고 그것은 지독히 악성 독즙을 함유하고 있다. 한이 있고 한을 제대로 승화시키는 사람의 삶은 늘 신명나고 활기 차있다. 나아갈 바 명료하게 설정된 목표가 있기 때문이다.
커피를 조금 마시던 양지는 진저리를 치며 입술에서 컵을 떼어냈다. 너무 달아서 속이 뒤집힐 듯 했다. 두 스푼의 커피에 설탕 약간. 프림은 넣지 않는다. 단맛보다 쓴맛을 즐기던 평소 그대로의 순서인데. 무의식적인 동작이 빚은 실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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