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7 (83)
정남은 조심스러운 성격도 그렇지만 작고 가녀린 체구며 전체적인 얼굴 윤곽이, 처음 보는 사람도 최 씨 댁 딸 아니냐고 알아맞힐 정도로 어머니의 젊은 모습을 빼다 꽂았다.
절벽을 기어오르는 담쟁이 넝쿨의 흡반을 연상시키는 끈질긴 내성과 소곤거리는 듯 정감 어린 어조는 더욱 확연하게 어머니의 분신임을 증명했다. 양지 역시 어머니의 선이 얇고 오똑한 코를 닮은 것 외에 생각의 골이 깊은 것이며 차라리 말하지 않음으로서 지키고 있는 냉정하고 예리한 자존심이 어머니의 사진과 같다.
그래서 양지의 자매들은 어머니의 운명을 두려워하며 그 울타리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쓰면서 살고들 있다. 하긴 그렇게 따지면 세상의 딸들 중 과연 몇이나 어머니의 전정을 흠모하며 따를 것인가.
양지는 의식적인 고갯짓으로 부질없는 상념을 털어 내며 서둘러서 제 자리에다 전화기를 걸었다. 번개같이 당도한 호남의 가출 소식 때문에 어머니는 또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전화라도 걸고 싶었으나 어머니는 호남이가 놓아준 전화를 두고도 전화 요금을 절약한다는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아예 코드를 뽑아놓고 있었다.
다시 발길을 돌리며 지갑 속에 챙겨 넣었던 동전을 꺼내 들었다. 마침 전화를 걸러 다가오는 청년 하나가 보였다. 차례를 빼앗기지 않으려 잰걸음질로 수화기를 걷어들었다. 동전을 꺼내들고 옆 칸으로 들어가는 청년을 보자 조금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마침표를 찍 듯 신중한 손가락 놀림으로 주인집 전화번호를 눌렀다. 언젠가처럼 귀신같이 집을 알아낸 호남은 또 저녁밥까지 지어 놓고 기다릴지 몰랐다. 마치 수학여행을 온 학생처럼 들뜬 목소리로 찻간에서 보고들은 이야기들을 부산하게 늘어놓으며.
불행 중 다행으로 호남은 와있지 않았다. 양지의 방까지 내려 가 신발을 확인하고 온 듯 좀 기다려 보라며 멀어졌던 주인댁이 돌아와서 덧붙였다.
“좀 전에 어떤 남자한테서 온 것밖에는…. 왜 무슨 일이 있어?”
“네, 그럴 일이 조금 있어요. 뭐 대단한 일은 아니구요. 회사에 일이 조금 생겼어요”
숟가락 끈이 매달려 있는 관계로 그런지 사람들은 회사 일 때문이라면 턱없이 관대해 지는 구석이 있다. 되도록 가볍게 말해 보이며 양지는 이마를 눌렀다. 제 자리에 수화기를 거는 순간 힘이 쑥 빠져내렸다. 아무 데나 상관없이 주저앉아 버리고 싶었다.
나는 왜 이렇게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흔들리며 복잡하게 살아야 하는가. 뭐 대단하게 훌륭한 능력도 없으면서 직무유기라도 하고 있는 듯 불편불안을 안고 말이다. 어디든 그대로 잦아들어 버리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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