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7 (95)
얼마나 진심에서 뜨겁게 우러난 표현인지는 몰라도 어머니의 내 탓이라는 말은 약방에 감초처럼 빠지지 않는다.
‘임신 3개월이라고 의사가 그라는데 골이 띵하데. 아차, 싶은 거라. 그 순간 와 그리 선뜻 옴마가 떠오르는지 몰라. 징그럽잖아. 호남이어매 아아 낳는 거는 여자들 쑥밥 묵고 똥 싸는 것보다 쉽다. 동네 사람들이 그라는데 얼마나 부끄럽고 창피했는지. 그때부터 내가 무슨 생각을 키았는지 아나? 난 절대 엄마 맹키로 애 낳는 기계 노릇은 안할 끼다. 우리들이 아기 대접이나 받고 자랐어? 주영아빠도 처음에는 좀 망설였지. 글치만 내가 누고. 난 절대 빈말은 안한다. 언니, 난 부모 자식들이 서로 아껴줌서 화목하게 사는 거 그게 제일 부럽더라. 하다못해 명자언니네 아부지가 딸들 안나무래고 하자하는 대로 법칙 없이 키우는 것도 자식 사랑 같애서 그리 부러웠다카모 말 다했다 아이가’
양지도 호남의 결단을 듣는 순간에는 무모하고 단순한 짓이라고만 나무랄 수 없는 깊은 아픔을느꼈다. 여자가, 여자의 상징인 자궁을 그것도 자신의 육신이 찢어발겨지는 아픔을 감수하며 불임수술을 받았다니…. 본인이 가진 이유는 충분하고 넘쳤다. 하지만 내 탓이라는 어머니의 자조적인 표현은 양지의 심금을 울리지 못했다. 너그럽게 들리지 않았다.
‘엄마, 제발. 지금 내 앞에 닥친 일만 해도 무겁고 복잡해요. 호남이가 어디 한두 살 먹는 언내요?’
‘하기사…. 미안하다. 너그 아부지 일도 다 잘돼간다. 집에 일은 조금도 신경 쓰지 말고 네 일이나 잘 봐서 회사 일이나 잘 되게스리 해라. 그만 끊는다.’
양지는 어머니의 말이 끝나자마자 소리 나게 전화기를 놓고는 했다. 목구멍까지 치받아 있던 울화가 눈 코 따위의 엉뚱한 구멍으로 폭발할 것 같았다. 언제나 그 모양이었다. 먼 곳 아득한 곳에 심어 둔 꿈결같이 아슴한 그리움은 항상 이런 식의 여운으로 마감을 했다. 가족이란, 부모란, 형제란 내게 무엇들인가. 양지는 얼굴을 싸쥐고 진저리를 쳤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다. 공간 개념도 없다. 흑백 영화의 한 장면 속 같은 곳을 양지는 가고 있었다. 강인지 바다인지 분간할 수 없는 물가에 닿았다. 검고 커다란 갯바위가 공룡들처럼 웅크리고 있는 사이에 몇 척의 배가 매여 있었다. 양지는 배에 올라 묶여있는 줄을 풀어 던지고 떠날 준비를 했다. 그러나 배는 도저히 움직이지 않았다. 배는 물도 없는 갯바위 옆에 쳐박힌 듯 꿈쩍없이 놓인 대로 아예 뿌리가 생겨 깊이 박힌 것 같았다. 어떻게든 물위로 배를 띄워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된 셈인지 물은 자꾸 쓸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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