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8 (97)
‘내 아무리 성공했다한들 이게 뭔가. 제 형제 하나도 올바르게 이끌지 못한 무관심은 무능이 아니고 무엇인가. 겨우 이 따위의 성취를 위해 그 악바리로 살았다니…. 아무래도 얻은 것들이 석연찮아. 잃은 것들의 흔적이 너무 크고 깊어. 정남아, 부디 깨어나라. 어서 빨리 깨어나라. 언니가 이제부터라도 너 하나만은 똑 소리 나게 뒷바라지해 줄 테다.’
자신은 미처 의식하지 못한 상태였지만 양지는 어느 결에 언니 성남의 심성을 대신하고 있었다. 양지는 이즈음 자신이 진정으로 챙기고 보듬어야 될 것들의 윤곽을 어렴풋하게나마 깨닫게 됐던 것이다. 그것은 부지불식간에 자신을 옭아매는 포박을 스스로 만드는 격이었지만 좁고 이른 연치로 인한 경륜은 미처 거기까지 이르지는 못했다.
그런 증명을 보이듯, 비질 자국도 선명한 뜰에, 한 마리 작은 새로 내렸던 흔적처럼 정남이 떠나가 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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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양지는 빨갛게 잘 익은 꽈리 묶음을 들고 사무실로 들어섰다. 점심을 먹고 시장 통을 지나오는 길에 시골 사람 행색의 노점상이 고동색 대야에 동부 몇 다발과 곁들여 놓고 있던 것이었다. 눈에 띈 첫 순간에는 아, 저것, 나도 어릴 때 명자언니네 울타리 밑에 있는 것을 똑 따서 속을 훑어내고 열심히 개구리처럼 뽀드득뽀드득 불었었지, 그렇게만 여겼다. 다음 순간 병상에 누워있는 정남을 생각하며 노파 앞으로 발길을 돌렸다. 고향에 대한 아늑하고 정겹든 추억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물건은 심신이 상해있는 정남의 병 치료에 도움이 될지 모른다싶었다. 물론 같이 공유했던 유년기의 추억은 적고 정남이 역시 꽈리를 즐겨 불었는지 어쨌는지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어 본 적은 없다. 하지만 고향의 냄새가 물씬 나는 물건들을 대하는 순간 혼란스럽게 흔들리는 정남의 멍든 영혼은 빠르게 순수를 회복하고 새 움을 틔우는데 도움을 받게 될 것이라 믿었다.
간밤 늦게, 맑은 정신이 잠시 들었던 정남과 대화를 나누면서 새로운 희망을 얻었다. 비록 과거의 아픔을 되새기며 눈물을 흘리며 분개한 정도였지만 그것은 곧 바로 희망을 향한 도전의 몸짓이 아니겠는가. 곁에서 지켜주고 이끌어 주며 바른 길로 동행한다면, 까짓 것 한나절 낮꿈 속에서 헤맸던 가시밭길에서의 상처쯤이야 이 좋은 세상에서는 얼마든지 회복 가능한 일일 것이었다.
들고 온 시장 꾸러미들을 꽈리 다발 옆으로 옮겨 놓고 양지는 퇴근을 서둘렀다. 정남에게 시골 정취를 느끼게 해주자고 작정한 김에 시장 골목을 누벼서 산 것들, 누렁둥이 호박과 하얗던 진이 까맣게 말라붙고 흰듯펀듯 껍질이 벗겨진 자잘한 고구마 한 바가지, 모과 두 개, 석류 세 개, 꾸러미가 제법 여러 개였다. 정남이 원한다면 즉석에서 호박범벅을 끓이고 고구마를 삶을 생각도 했다. 이런 일련의 계획들은 막막하기만 하던 양지의 심정에다 무릇 희망과 생기를 퍼부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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