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8 (100)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8 (100)
  • 경남일보
  • 승인 2016.03.01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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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김지원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8 (100)

이 순진하고 앳된 아이를 이 지경으로 만든 그 속악한 인심들. 양지는 떨리는 입술을 굳게 다물며 정남을 다시 끌어안았다.

뜨거운 불가마에서 날개를 떨치고 훨훨 날아 나오는 불새처럼 여태껏 겪어보지 못한 형제애로 가슴이 뻐근하게 충만해 왔다. 그래도 괜찮을까,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정남의 얼굴을 씻기고 출산으로 미처 정돈되지 못한 두억시니 머리를 감겼고 옷을 갈아 입혔다. 작고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정남도 잘 따랐다. 이제는 언니의 명이라면 죽으라고 하면 죽을 각오까지 하고 있는 듯 한 순종적인 모습이었다. 약을 가지고 간호사가 들어 올때까지 그들은 과일을 먹으며 고향 이야기도 조금 했다.



정남이와 보냈던 시간을 톺아가던 그 순간, 머리를 맞은 듯한 현실감을 회복한 양지는 파경같은 눈빛으로 수찬을 돌아보았다. 돌풍에 휩싸인 물결처럼 감정의 물결이 출렁거리며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실수였다. 고향 얘기를 해서, 이제 조금 진정되어 있는 정남의 죄의식을 휘저었음이 분명했지만 그때는 미처 의식하지 못했는데 사고는 항상 느닷없이 뒤통수를 친다.

약을 먹고, 양지가 덮어주는 이불 밑에서 아기처럼 방긋 정남은 웃어 보였었다. 그래, 이제부터는 부디 복되고 명랑한 꿈만 꾸는 거야. 잘 자라. 네 기분에 따라서 내일은 새롭게 탄생될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은 자매가 가졌던 현실 세계에서의 마지막 아름다움이었다.

온 가을을 그렇게 정남의 증발과 출현으로 정신없이 보냈다. 그러나 동생 정남이 모녀를 위해 큰 몫을 해야 된다 싶으니 마음은 얼마나 벅차고 분주했던가. 외롭고 쓸쓸할 때 따뜻한 온기와 관심을 느끼며 가까이 할 수 있는 누군가가 곁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지를 깨달아가고 있던 참이었다. 자신의 가슴속에 잠재해 있는 형제자매에 대한 애틋함과 흐뭇한 정의 발견도 커다란 보람이 되었다.

수찬에게 묻고 싶었지만 양지는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뭔지 모를 불길함으로 지뢰밭 가운데 서있는 것처럼 두렵고 무서웠다..

“눈 감고 뒤로 좀 기대세요”

양지의 거동을 주의 깊게 살피고 있었던 듯 수찬이 걱정스러운 눈길을 보냈다. 양지는 어금니를 악물었다. 씻은 마늘쪽처럼 순결하고 단아할 때의 정남의 모습이 떠오르는가하면 햇볕도 들지 않는 모퉁이의 자취방에서 샛노랗게 시들어 있던 모습이 나타났다. 뒤를 이어 광포하고 히스테리칼한 정신병자 특유의 행동이 밀려왔다. 추하고 해괴한, 뭐라 말할 수 없이 변모한 탈바가지들이 그녀의 시야를 어지럽혔다.

‘어허, 무슨 놈의 차가 이렇게 막히나 그래.’ 구시렁거리던 수찬이 샛길로 차를 몰았다. 급히 핸들을 꺾자 양지의 몸이 옆으로 쏠렸다. 미처 방어하지 못한 충격으로 팔목의 관절이 접질렸지만 아픔을 느끼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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