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8 (110)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8 (110)
  • 경남일보
  • 승인 2016.03.01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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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김지원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8 (110)

새마을 부녀 회장도 하셨고 동네 사람들하고 계도 많이 하시기 때문에 대화가 안통하지는 않을 거야. 현태로부터 미리 들어서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뚜렷한 자기 소신을 저만큼 표현할 수 있는 여인이라면 신식 견해는 이렇다고 섣불리 늘어놓다가 큰 코만 다치고 말리라. 양지는 더욱 조심스러운 자세로 앉아 현태어머니의 커다란 젖가슴을 가리고 있는 불룩한 옷섶 주변에다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현태는 얼마나 더 있어야 돌아오나 신경은 온통 출입구에다 보내놓은 채.

“집에는 여자가 떡하니 엉뎅이를 붙이고 있어야 따순 짐이 나제. 우리 동네에 마누라 잃은 홀아비들이 서넛 있는데, 살았을 때는 서푼어치도 안되더마 죽고 없으니 여러 만냥어치라꼬 그 사람들 말이 있다. 사실 안그렇나, 우리 집 저 어른 저 연세가 되시도 집에 오시가 첫눈에 내가 안 뵈이모 밭들이고 논들이고 내 찾아서 나온다. 철부지 어린아들은 말할 것도 없는 기고. 그런데 우리보다 많이 배우고 유식해서 잘살 줄 알았던 요새 젊은 여자들이 그걸 몬깨달는거 보모 참 답답하데. 조물주가 애초부터 마련할 때 남자는 바깥 일해서 가족들 믹이 살리고 여자는 살림 살고 아아 낳아서 잘 키우라꼬 소임을 정해 안 줬나. 여자를 꼬타리 보고 값 매기모 안되제. 여자는 작아도 그 집에 주춘 기라. 아가씨 생각해 봐라. 주추가 없이모 기둥이 아무리 실해도 바로 서것나”

양지는 숨이 막혔다. 어느 결에 한 시골 아낙네가 둘러친 촘촘한 울타리는 커다란 성벽이 되어 꼼짝없이 그녀를 가둘 것 같다. 이론인 즉 틀리는 곳 없는 말이다. 고향의 부모가 딸들에게 했던 말도 비슷한 골격의 내용이었다.

그러나 결론을 비난으로만 돌릴 수 없는 것이, 겉으로는 며느리가 아무리 열 남자 접어내는 기특한 재주가 있다하나 직장 때려치우고 집에서 살림이나 잘하는 것보다 못하다는 지극히 구시대적이고 판에 박힌 엄명이고 요구 조건이지만, 결론은 여자의 중요성을 일깨워 준 데 있다. 양지는 남편과 아이들을 떼 놓고 유학 가고 없는 친구 순화를 얼핏 떠올렸다. 부부가 화합한 그 동창의 예를 들면 이 선배여인은 또 어떤 반응과 결론을 내릴 것인가.

벌써 며느리라도 된 듯 양지의 등을 토닥거려주며 그들은 갔다. 직장 문제는 앞으로 의논해서 결정짓겠다는 현태의 말과 현태아버지의 그게 정칙이라는 도움말로 결론을 뒤로 미루는데 어려움은 없었다.

양지의 작고 야윈 손을 잡은 현태어머니의 투박한 손은 흔히 말하는 고부간의 갈등은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는 약속처럼 푸근함을 전해 주었다. 어떻게든 자신을 한 번 정리해보는 것도 좋겠다싶어 양지는 심성 유순한 처녀인양 시종 미소로서 대답을 대신했다. 언제 날 잡아서 양가 부모가 한 번 만나야겠지. 결혼하기 싫다면 양지 자신이 우먼파워의 총무였던 얼마 전까지의 활동을 현태어머니께 밝혀도 됐을 것이다. 현태어머니가 아무리 통 큰 아낙일지언정 이렇게 엉뚱하고 당돌한 처녀를 큰며느리로 맞이할 만큼 열린 세대는 아닌 것을 양지는 알고 있었다. 이 이율배반적인 심사는 과연 어떤 결론을 원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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