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필휘지(一筆揮之)란 붓을 한 번 휘둘러 단숨에 써내려가는 것을 말한다. 중간에 끊어지지 않고 써내려가야 하고 가다 끊기면 그 아름다움은 사라진다. 멈추지 않는 붓의 움직임 속에 처음과 끝이 서로 조응(照應)하며 믿음과 힘이 살아 있는 것이다. 일필휘지 같은 삶을 산다는 것은 명상과도 같다. 그것은 삶의 깊은 차원에 이르려는 방법이다.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던 온갖 생각과 관념을 말끔히 씻어내는 마음의 청소다. 일필휘지처럼 삶이 간결하면 겉치레가 사라지고 순수함이 드러난다. 가장 단순한 것이 가장 명확하다. 가장 높은 힘은 자신을 낮추는 골짜기에 있음을 알고 자기를 낮출 때 삶의 군더더기가 한 꺼풀씩 떨어져 나가는 것이다.
나는 처음과 끝이 같은 사람을 두고 일필휘지 같은 사람이라 말하고 싶다. 상황에 따라 때에 따라 또는 처지에 따라 수시로 변하는 사람들로 지천인 요즘 세상에 그만큼 그런 사람이 드물기도 하겠지만, 나 역시 근처에도 못 가는 속물이니 처음과 끝이 한결같은 사람이 그리운 것이다. 상황따라 변하는 마음을 억누르고 처음을 잃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절실하면 어디를 가든 ‘처음처럼’이란 말이 붓글씨나 나무에 씌어 벽에 걸려 있고, 소주 이름도 처음처럼, 사이버공간에서도 늘 처음처럼이라는 애칭이 흔하다. 예전에는 없었던 말이니 그만큼 세상인심이 변하고 상황에 따라 사람 마음이 들쭉날쭉해졌나 보다.
선거철이 되거나 어떤 일을 두고 많은 사람이 “저는 초심을 잃지 않고 제가 한 말을 반드시 지키겠다”고 하는 사람의 말을 흔하게 듣는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치고 초심을 잃지 않은 사람이 드물고, 약속이 지켜지는 것을 보기 어렵다. 그리고 그 말을 자주하는 사람일수록 약속한 것을 성취하는 것도 보지 못했다. 나는 정말로 중요한 말이라고 하며 다가오거나 무엇에든 ‘반드시’란 말을 즐겨 쓰는 사람 말은 대부분 믿지 않는다. 꼭 할 사람은 말하지 않아도 하는 사람이고 중요한 것은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는 법이다. 일필휘지처럼 처음과 끝이 같은 사람을 만나고 싶다. 내가 그렇지 않은데 언감생심 그런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마는 시간이 걸려도 그 같은 삶의 고수를 만나는 걸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알겠는가. 내일이라도 내가 자주 가는 곳 바로 눈앞에서 맞닥뜨릴지도.
이홍식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