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0 (143)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0 (143)
  • 경남일보
  • 승인 2016.05.08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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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김지원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0 (143)

멧방석같은 그루터기 주변으로 허옇게 쌓여있는 톱밥이 흘러내린 나무의 진액에 젖어 축축하게 부풀어 있고 미처 수거하지 못한 잔삭다리가 수북하게 방치되어 있는 깐으로 보아 나무는 벤지 오래된 것 같지 않았다.

집으로 들어서자 폐허 된 절간같이 쓸쓸하고 적막한 마당에는 이리저리 가랑잎과 짚검불 따위만 바람을 맞아 휩쓸려 다니고 있었다. 차라리 볏짚으로 이엉을 엮어 얹은 조그만 오막살이라면 고즈넉한 세월의 정감이라도 느낄 수 있었을 텐데 큰 덩치에 담긴 많은 해괴한 사연으로 인해 건물은 어린 저를 길러 준 고향집이라는 그리움은커녕 스산스럽기만 하다.

중문을 넘어 안마당으로 가야하건만 양지는 움직이지를 못한다. 된서리 맞은 텃밭에 눈길이 쏠렸다. 잎사귀와 끝물고추가 데친 듯이 쳐져내려 있는 고추밭. 부지런하고 야무진 어머니가 다 지은 농사를 저 따위로 이유 없이 팽개쳐 둔 것은 경황없이 분주한 어머니의 요즘 심경이 그대로 미친 여파이리라.

너거 어매 언양 갔대이. 사나흘 걸린 다카지 아마. 동구에서 만난 이웃 아주머니의 말을 듣는 순간 양지는 그냥 돌아가 버릴까하는 생각을 얼핏 했다. 자신이 몹시 초라한 데 울화가 치밀었다. 정말 이 따위의 귀향은 그녀가 원하는바 아니었다. 그러나 이왕 온 길이라 내처 돌아서지지 않게 날은 기울고 전신에 힘도 풀렸다.

그녀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흐릴 것 같던 하늘은 그래도 아직 기운 햇살을 거느리고 엷게 가로 누워있었다. 서산머리로 멀리 보이는 하늘로 눈길을 보냈다. 안장산 꼭대기에서 먹구름이 몰려오지 않는 한 겨울비는 오지 않는다고 날씨를 점치던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깨끗하고 기품 있게 늙은 종갓집 종부들의 모습을 신문이나 티브이 화면을 통해 볼 때마다 불현듯 어머니를 떠올리곤 했다.

가솔이 번창하고 재산 있는 집 종부는 시집살이도 호되지만 가내 대소가의 사람들로부터 존중을 받는 영광스러움도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생애는 어떠했던가. 바람언덕에 선 갈대처럼 혼자서 외로운 집안의 온갖 어려움을 버텨내느라 몸피조차 삐쩍 말라 있다. 안장산 꼭대기에 비를 담은 구름이 실려 있는지 없는지를 혼자 관찰하듯이 가까운 일가붙이 하나 없이 집안의 대소사를 혼자서 계획하고 실행해야만 했던 어머니. 사방을 둘러봐도 자신 하나뿐인 것을 알면서 외롭고 고독한 길을 걸어올 때 어머니는 무슨 생각을 하며 자신을 추슬렀을까. 그녀는 다시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본다. 북동풍을 막아서 안방처럼 따스하게 마을을 감싸주던 동묏등이 지쳐있는 늙은 소의 모습으로 누워있는 게 얼추 나목이 된 잡목림 사이로 바라보였다.

물기가 말라비틀어진 걸레로 대강 먼지를 훔친 양지는 마루 끝에 엉덩이를 걸쳤다. 기우뚱한 아래채 모퉁이에 있던 더그매 쪽으로 자연스럽게 시선이 나아갔다. 거기에는 암탉이 알을 낳거나 병아리를 깔 때 사용하던 짚둥우리가 오래 전에 불용선고를 받은 채 느슨하게 매달려 있었다. 그러고 보니 참 여기 이쯤이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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