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절은 남의 자식을 ‘유괴’하는 일”
“표절은 남의 자식을 ‘유괴’하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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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7.09.03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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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비평가 토머스 맬런 ‘표절, 남의 글을 훔치다’
올해 1월 종영한 SBS TV 드라마 ‘푸른 바다의 전설’ 대본을 집필한 박지은 작가가 검찰의 무혐의 처분으로 표절 혐의를 벗었다는 소식이 29일 전해졌다.

 이 기사가 그나마 사람들의 눈길을 끈 것은 한류스타와 인기작가가 뭉친 드라마였기 때문이다. 소설부터 간편식 제품 디자인, 인사청문회를 앞둔 장관후보자 논문에 이르기까지 온갖 분야에서 표절 문제가 제기된다. 하지만 이제 사람들이 어지간한 논란에는 끄떡도 않을 정도로 일상적인 ‘표절 사회’로 탈바꿈했다.

 신간 ‘표절, 남의 글을 훔치다’(원제 ‘Stolen Words’)는 미국 소설가이자 수필가, 비평가인 토머스 맬런이 영문학을 줄기로 삼아 표절범들을 파고든 책이다.

 1장 ‘흔한 생각, 전에 사용된 표현’은 18세기로 달려가 영국 시인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1772~1834)를 겨눈다.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시인이며 바이런 등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받는 작가가 실제로는 칸트, 멘델스존, 슐레겔, 셸링 등의 지적 재산을 탐욕스럽게 긁어모았다는 것이다.

 콜리지 사망 직후 그의 표절을 고발한 영국 비평가 겸 소설가인 토머스 드 퀸시 자신도 표절범이었다는 지적에는 실소가 절로 나온다. 저자는 “표절을 연구하다 보면, 문학적 잡탕을 끓여내는 가마솥이 문학적 잡탕을 끓여내는 냄비를 나무라는 소리에 귀청이 떨어질 지경”이라고 조소한다.

 부정과 불의에 항거하는 소설로 유명해졌고 ‘해적질’로부터 극작가들을 보호하려고 애썼던 찰스 리드(1814~1884), 예일대 졸업 직후 출간한 첫 소설 ‘난봉’으로 주목받았지만 표절 사실이 발각된 제이콥 엡스타인이 다음 과녁이다. 저자는 이들의 행적을 좇아가면서 무언가에 쉽게 중독되거나, 자신의 작품 소유권을 지키는 데는 열성인 표절범들의 초상을 완성해 간다.

 물론 표절이 태생적으로 부도덕하거나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일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남의 글을 베껴 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대다수 창작자가 공유하는 것이다. 저자 자신도 책에서 “표절을 주제로 하는 책을 쓰는 와중에도 마치 제왕절개 수술을 받은 후에 마비 증상을 겪는 산모처럼 이 두려움이 부풀어 오른다”고 고백할 정도다.

 책이 최종적으로 조준하는 것은 표절 그 자체보다 범죄를 제대로 단죄하지 않는 학계와 사회다. 저술 상당수가 표절임이 드러났음에도 전문가들이 머뭇대는 사이, 사임 후 자리를 옮긴 제이미 애런 소콜로 전 텍사스 이공대 교수의 이야기가 이를 보여준다.

 저자는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팔짱을 낀 채 표절 문제를 대하는 대중의 인식을 비판한다. 서문은 오래도록 머릿속을 맴돈다. “다른 것들은 모두 접어두더라도, 한 작가의 작품은 그의 자식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생각해보라. 동화 속에서 아이를 바꿔치기하듯이, 한 저자의 단어들이 누군가 다른 사람의 글 안으로 유괴당해 감금되는 광경은 제3자의 마음에도 역겨움을 일으키기 마련이다.”

 1988년 발간됐지만, 갈수록 표절 문제가 빈발하는 우리 사회에도 유용한 돋보기 같은 책이다.

 박동천 옮김. 2만 5000원.

연합뉴스



 
신간 ‘표절, 남의 글을 훔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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