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현의 박물관 편지[12]
김수현의 박물관 편지[12]
  • 경남일보
  • 승인 2018.06.14 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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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스 할스 뮤지엄(Frans Hals Museum)
하를렘을 둘러싸고 있는 스파른 강과 관광명소 아드리안 풍차.

네덜란드의 수도 암스테르담에서 서쪽으로 약 20㎞ 떨어진 곳에 위치한 ‘하를렘(Haarlem)’은 북부 네덜란드의 주도(主都)역할을 하는 도시다. 때때로 뉴욕 할렘(Harlem)지역의 명칭과 하를렘이 혼돈되기도 하는데, 이는 뉴욕 할렘의 명칭을 도시로써의 모습을 먼저 갖추고 있던 네덜란드 하를렘에서 따왔기 때문이다.

하를렘은 관광객들로 붐비는 암스테르담에 비해 여유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도시를 둘러 싸고 있는 스파른강의 풍경으로 더욱 고요한 정취를 지니고 있다. 또한 하를렘과 그 근교지역에서는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튤립의 재배가 수 세기동안 이루어지고 있어서 ‘꽃의 도시’라는 별명도 지니고 있다.

14세기의 하를렘은 네덜란드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로써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1429년 하를렘은 스파른 강위를 지나가는 통행료를 징수 할 수 있는 권리를 얻었고, 중세가 끝나갈 무렵에는 섬유업, 조선업, 양조업 까지 발달하며 큰 번영기를 누렸다.

그러나 17세기를 맞이하는 동안 선박 운송과 무역이 경제적으로 큰 역할을 하게 되면서 암스테르담으로 그 패권이 넘어 갔다. 많은 사람들이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하면서 주요 도시로써의 명성은 잃었지만 중세시대의 건축물이 시가지 곳곳에서 하를렘의 찬란했던 역사를 증언한다.

하를렘의 번영기는 도시의 문화, 예술 발전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당시 하를렘에서 작품 활동을 했던 수많은 화가들 중 단연 으뜸은 초상화의 대가로 손꼽히는 프란스 할스(Frans Hals, 1582~1666)다.

 

▲ 기분좋은 술꾼(The Merry Drinker), 프란스 할스, 1630년 작, 캔버스에 유채 , 81 × 66.5 cm ,암스테르담 국립박물관 소장.


프란스 할스는 플랑드르(지금의 벨기에)의 안트베르펜에서 태어나 네덜란드 하를렘으로 이주해 전 생애를 하를렘에서 보냈다.

일반적으로 렘브란트 같은 동 시대 화가들은 후원자의 요구에 따라 암스테르담 등으로 거주지를 옮겼지만 할스는 그러한 요구를 거부하고 하를렘에서만 작품 활동을 이어나갔다. 할스의 모델이 되었던 사람들은 하를렘 출신이 대부분이거나 자신의 초상화를 위해 기꺼이 하를렘에 방문했다.

그는 특히 초상화에 두각을 나타내었는데, 할스의 강한 붓 터치를 바탕으로 한 독특한 인물표현방식은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할스는 개인 초상화뿐만 아니라 부부를 위한 초상화, 집단 초상화에까지 그 능력을 발휘했다. 네덜란드에서는 어느 박물관을 가더라도 건장한 남성 10명 남짓을 하나의 캔버스에 담은 단체초상화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당시 네덜란드에서는 중산층이 길드를 조직하여 도시를 지키는 민병대 활동을 벌였는데 이들은 활동이 끝난 후 자신들의 업적을 초상화를 통해 기념하고 싶어 했다. 프란스 할스 역시 하를렘에서 민병대 활동을 했고 이후 민병대원들의 초상화 작업을 맡으며 큰 명성을 얻었다.

 성 조지 민병대 장교들의 연회(Banquet of the officers of the Civic Guard of St. George), 1616년 작, 란스 할스, 캔버스에 유채.


특히 1616년 그가 처음 완성한 ‘성 조지 민병대 장교들의 연회’는 큰 성공을 거두며 단체 초상화가로써의 빛나는 행보를 예고했다.

민병대원들은 시의회에서 3년의 임기로 임명되었는데 이들은 3년간의 활동을 마치고 그들의 마지막을 축하하기 위해 연회를 열었다.연회를 즐기고 있는 대원들의 얼굴은 일률적이지 않고 각자의 특징이 명확하게 구별되며 다양한 포즈와 표정으로 성격까지 드러나는 듯하다. 프란스 할스의 단체 초상화는 캔버스의 크기부터 압도적이다. 대부분 3미터가 훌쩍 넘는 그림들은 전시실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어서 먼발치에서 그림을 들여다보아야 한눈에 들어온다.

할스는 평생을 초상화에 집중했던 대가답게 자신만의 표현방법이 명확해서 박물관을 다 둘러보고 나올 때쯤이면 그의 그림이 머릿속에 자연히 떠오른다.

초상화라고 해서 경직 된 얼굴만을 나타내지 않았고 미소나 손짓, 자세에서 모델의 성격이나 특징을 파악 할 수 있도록 표현했기 때문이다. 또한 할스의 초상화는 부유한 귀족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고 가수, 아이, 상인, 주점 주인 등 까지 다양한계층 및 연령을 아울렀기 때문에 그림을 통해 17세기 네덜란드 황금기의 생활상을 여러 모습으로 만날 수 있다.

프란스 할스가 추구했던 표현방식의 원천은 생동감 있는 묘사와 살아있는 붓 터치에서 부터 시작된다.

거친 선을 있는 그대로 살려내고 붓질을 과감하게 하여 표면을 부드럽지 않게 하는 그의 독특한 표현 방식은 큰 주목을 받으며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이것은 할스의 뒤를 잇는 많은 화가들에게 귀감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할스의 표현법까지도 추구하게 만들었다.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는 동생 테오 에게 ‘프란스 할스를 보는 것이 얼마나 기쁜가’라고 표현하며 똑같은 방법으로 처리된 동시대의 작품들과는 확연히 다른 할스의 작품에 찬사를 보냈다고 전해진다. 프랑스 인상주의를 대표하는 마네 역시 할스의 그림과 표현기법에 큰 감흥을 받아 자신의 표본으로 삼았다.

할스의 작품은 그가 생을 마감한 후에 인기가 더 해져 오늘날 네덜란드에서 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찾아 볼 수 있다. 19세기부터는 벨기에, 캐나다, 런던, 뉴욕에 이르기까지 할스의 작품이 수집되었고 상당수가 미국의 수집가에게 팔렸다.

 

▲ 성 조지 민병대의 장교들(The Officers of the St. George Militia Company), 1639년 작, 프란스 할스, 캔버스에 유채.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 초상화의 대가라고 여겨지는 프란스 할스의 단독 자화상은 찾을 수 없다. 할스의 자화상으로 짐작되는 작품이 몇 점 발견되었지만, 그림에 대한 정확한 배경과 할스의 작품이라는 단서가 발견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할스는 1639년 그의 마지막 민병대원을 위한 단체 초상화 ‘성 조지 민병대의 장교들’에서 자신의 모습을 표현했다(두 번째 줄 왼쪽에서 두 번째). 할스는 큼지막하게 표현되는 그림안의 자신과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것일까?

보기 좋은 그림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솔직했던 프란스 할스의 초상화. 프란스 할스 박물관에서 그 진가를 확인할 수 있다.

주소: Groot Heiligland 62,2011 ES Haarlem, 네덜란드
운영시간: 화~일 오전 11시~오후 5시(월요일 휴관)
홈페이지: https://www.franshalsmuseum.nl/
입장료: 성인 15유로, 18세 이하 무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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