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경남의 3·1독립운동 (2)진주(상)
[특별기획] 경남의 3·1독립운동 (2)진주(상)
  • 임명진
  • 승인 2019.02.19 2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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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터에서 일어난 만세행렬…산천이 진동했다

“두 눈 감고 가슴에 손 얹으면 땅을 흔들던 고함소리 귓전에 다시 새로워라. 반만 해를 맥맥히 이어 슬기로 다듬고 죽음으로 지켜온 내 조국, 왜구 너의 간계에 잠시 더럽혔나니 어찌 그 치욕이 체념으로만 잠잠했으랴. 기미년 삼월 초하루 겨레의 분노는 마침내 꺼질 줄 모르는 불길로 타오르고 독립만세 소리는 차라리 겸허했어라. 같은 해 삼월 열여드레 장날 스무두 어른 앞장서 횃불 밝혀 높이 들었으니…(중략)”


진주 도심을 유유히 관통하는 남강을 끼고 있는, 진주시민들에게는 호국의 성지로 불리는 진주성에는 위와 같은 글귀가 새겨진 3·1독립운동 기념비가 서 있다.

진주는 경상남도의 도청소재지로 결정된 1894년 이후 ‘북평양 남진주’로 불릴 정도로 남도지역의 문화, 행정, 상업 등의 중심지로 그 역할을 했다.

특히 남명 조식 선생의 영향으로 신분을 불문하고 민족의식과 외세에 대한 저항의식이 남다른 지역이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진주성 1차, 2차 전투를 치르며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입혔고, 일제강점기 시절에는 지리산을 중심으로 의병들이 활약했다.

그런 진주에 서울에서의 3·1독립만세운동의 소식이 전해진 것은 오래지 않았다.

 

◇진주장터에서 들불처럼 일어나다


진주에서의 3·1만세운동에 참여하다 일경에 체포돼 옥고를 치룬 한규상의 자서전 ‘나의 조국 나의 교회’에는 당시 진주 만세운동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행동개시의 정오가 되자 봉래동 예수교회 예배당 종소리를 신호로 시내 5구역 촉석광장, 남문안 시장, 재판소 앞, 봉곡동, 대안동에서 대기한 주모동지가 출현하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시민을 집합시킨 후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태극기를 분배 소지케 하고 시가지 가로를 시위 행진하여 목이 터지도록 만세를 고창하니 삽시간에 5구역 시민들이 벌떼 같이 모여들어 온 시중은 만세꾼이 홍수같이 창일하여 만세를 호창하니 산천이 진동하였다’

진주 3·1운동은 고종황제의 국장일에 갔다가 서울에서의 3·1운동을 목격한 김재화, 조응래, 심두섭 등이 진주로 귀향하면서 불을 지폈다.

이들의 목격담이 김재화, 박진환, 이강우 등에게 전해지고 비밀리에 서울서 가져온 독립선언서와 격문, 그리고 지역 정서에 맞게 새로 쓴 교유문을 수천여 장 제작하면서 진주에서의 만세운동이 논의되기 시작했다.

마침내 진주 장날을 맞아 3월18일(음력 2월17일) 진주읍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독립만세의 외침이 울러 퍼지기 시작했다.

수많은 군중이 일제히 대한독립만세를 외칠 때 사용된 신호용 수단이 ‘종소리이냐, 나팔소리이냐’는 논쟁이 한때 일기도 했다.

이는 진주3·1운동을 기록한 각각의 문헌에서 신호용 수단에 대한 기재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벌어진 현상이다.

일시에 대규모 만세시위가 펼쳐지자 당황한 일본경찰은 진압에 나섰고 시위군중간에 충돌이 벌어졌다.

이를 목격한 일반시민들의 참여가 하나둘 늘어나면서 당일 오전11시 무렵에 시작된 만세시위는 밤늦도록 횃불을 밝히며 이어졌다.

진주의 만세시위는 장터가 열린 진주읍을 비롯한 인근 문산과 반성, 미천, 수곡, 정촌, 금산, 금곡 등지에서도 연이어 벌어졌다.

 

◇서부경남 대표 만세시위…규모면에선 서울 다음

진주의 만세운동은 그 규모면에서 남달랐다고 전해진다. 전국적으로 서울 다음으로 많은 2~3만 명이 만세시위에 동참해 일본 측을 당혹하게 했다.

일본 측 기록인 ‘조선소요사건’ 등에서는 진주 만세운동의 규모를 8000여 명으로 기록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이보다 훨씬 많았을 것으로 보고 있다.

진주항일운동사를 펴낸 추경화 독립운동사료연구가는 “진주 3·1운동은 대단히 성공적인 시위로 평가된다. 일본경찰 입장에서는 축소해 보고할 수밖에 없는 신분이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2만부터 3만 명의 군중이 동원되고 참여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당시 진주의 인구를 다룬 본보의 기사에 따르면 1910년 12월 진주군 인구는 9만 548명으로 집계돼 있다. 시위가 열린 날이 장날이라는 점과 당시 진주의 인구를 감안하면 2~3만 명의 참가규모는 충분히 가능한 숫자라는 것이다.

실제 만세운동이 열린 3월18일은 인근 사천과 하동, 산청 등지의 주민이 대거 모이는 진주 장날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서부경남을 대표하는 독립만세시위로 보는 게 더 타당하다는 지적도 있다.

독립운동사 제3권 삼일운동사(하)의 기록에 의하면 진주장터는 도내에서 가장 큰 장으로 각처에서 1만 명 전후의 인파가 모여들었다고 기록돼 있다.

추경화 독립운동사료연구가는 “진주가 도청소재지로 진주 장날 또는 무슨 일이 있으면 산청, 단성, 사천, 하동, 남해가 하나로 뭉치고 단결하고 연계해 왔다는 점에서 진주 3·1운동이라고 하기보다 서부경남을 대표하는 시위였다는 사실에서 고찰해야 될 문제”라고 말했다.

 

진주성내 위치한 3.1독립운동 기념비. 지난 2004년 독립현충시설로 지정됐다.


“다가올 희망의 100년을 위한 국민통합의 계기되길”
김덕석 경남서부보훈지청장

3·1운동과 상해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의 의미를 어떻게 기억해야 할까.

김덕석 경남서부보훈지청장은 “3·1독립만세 운동은 우리 민족의 당당함과 자주독립이 무엇인가를 깨우쳐 주는 역사적 가르침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경남서부보훈지청은 100주년을 맞아 3·1운동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다양한 행사와 더불어 후손들을 위한 노후복지에 힘쓰고 있다.

특히 100년 전 우리 지역에서 열렸던 독립만세운동을 소개하고 알리는 일에도 역점을 두고 있다.

국가보훈처는 3·1만세운동 재현 전국 릴레이 ‘독립의 횃불’ 행사를 오는 3월1일부터 4월 11일까지 전국 22개 지역의 주자 봉송과 78곳의 차량 봉송 등 총 100곳에서 불을 밝힐 예정이다.

경남에서 유일하게 선정된 진주지역은 3월17일 진주 로데오 거리에서 100명의 봉송주자들이 횃불을 밝히게 된다.

이 과정에 독립유공자 후손을 포함해 다양한 계층의 봉송 주자들이 참여해 그 의미를 더할 계획이다.

김 지청장은 “이 외에도 18일에는 합천 삼가장터 3·1만세운동 제100주년 기념추모제, 19일에는 고성 배둔장터 독립만세운동 재현행사, 21일 사천초등학교에서 기미년 독립만세운동재현 축구대회 등 그날의 의미를 가리는 각양각색의 재현행사가 실시될 예정”이라고 밝혔다.

임명진기자 sunpower@g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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