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나nie 9-진주에서 시작된 형평운동
에나nie 9-진주에서 시작된 형평운동
  • 김지원 기자
  • 승인 2019.04.30 17: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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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회 형평사 전국대회 포스터



1923년 4월24일. 진주시 대안동에 있던 노동공제회관(현 하얀메디컬 인근)에는 이른 아침 70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 속에는 강상호, 신현수, 천석구 등 진주시내 지식인들이 있었습니다. 의령사람인 장지필도 모습을 보였죠. 장지필은 백정출신 이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 역시 진주 공설시장(중앙시장)에서 식육점을 경영하던 이학찬 등의 백정이었습니다. 백정과 사회지식인들의 모임. 이 모임은 바로 ‘형평사 기성회 조직대회’였습니다.

형평(衡平). 저울대 衡과 평평할 平을 묶은 이 말은 저울추처럼 평등한 세상을 추구하는 외침이었습니다.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으로 양반과 평민, 천민으로 사람간에 계급을 두던 신분제도 타파되었지만 30년이 가깝게 지나도 여전히 백정이라는 신분으로 박해받던 민중들이 “백정도 사람이다”라며 신분해방을 외친 평등 운동이었습니다.

백정에 대한 핍박은 수백년 이어져 온 억압이었습니다. 갑오개혁 이후 돈을 벌어 부유해진 백정들도 많았지만 그들에게는 기와집에 살거나 비단옷을 입거나 망건을 착용하는 일도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소를 잡아 가죽을 얻을 수 있지만 가죽신을 해 신을 수도 없고, 외출길에 패랭이를 쓸 수도 없었습니다. 집안에 어른이 돌아가시면 상여도 쓸 수 없고, 일반인들과 같은 묘지도 쓸 수 없었죠. 혼인 때도 말이나 가마를 탈 수 없었습니다. 비녀를 쓸 수 없도록 해 머리를 땋아 말아올린 둘레머리만 할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이름에 인(仁), 의(義), 효(孝), 충(忠) 같은 글자를 사용하지 못하게 했지요.

나이든 백정도 어린 일반인 앞에서는 머리를 숙이고 ‘소인’이라고 스스로를 불러야 했습니다. 백정이 이런 관습을 어기면 마을 사람들의 사사로운 형벌을 당하기도 예사였습니다.

진주에는 옥봉동 씨앗고개(사잇고개)와 서장대 아래에 백정들이 집단으로 거주했습니다. 이들은 수백년에 걸친 억압과 세상이 바뀌었지만 여전히 지속되는 핍박에 마침내 떨치고 일어나 전국에서 최초로 ‘평등’을 외치게 된 것이었습니다.

강상호 선생(왼쪽)과 신현수 선생

 

그것이 바로 4월24일 열린 ‘형평사 기성회 조직대회’ 였습니다. 이날 강상호 선생은 “동지여러분, 공평은 사회의 근본이고 인류의 본질입니다. 그러나 우리 백정들은 그동안 어떤 대우를 받아왔습니까. 과거를 회상하면 눈물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백정은 인간이 아닙니까?” 라며 연설의 포문을 열었습니다. 강상호 선생의 연설에 ‘옳소’ 하는 댓구와 박수갈채가 쏟아졌죠.

그리고 이튿날인 4월25일에는 노동공제회관에서 다시 80여명의 청장년들이 모여 ‘형평사발기총회’를 열었습니다. 이날을 형평운동의 태동일로 보고 있습니다. 이날 참가자들은 백정의 처지를 밝히고 인간으로서 평등과 해방을 주창하는 ‘형평사 주지’를 발표했습니다.

이날 형평운동은 백정 스스로 일어난 평등운동이면서 진주지역 사회지식인들이 적극적으로 동참해 일어났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중에서 특히 강상호 선생은 이들의 형평운동에 큰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강상호 선생은 1887년 진주에서 태어난 부농의 아들이었습니다.


강상호 선생은 진주에서 학교를 나와 3·1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한 일로 1년간 옥살이를 하기도 했습니다. 동아일보 진주지국장으로 일하기도 했습니다. 강상호 선생은 진주공존회, 동우사, 사립일신고 등 보통학교설립기성회, 경남도청 이전반대운동 등 활발한 사회운동을 벌였던 지식인이었습니다.

강상호 선생 등 진주 사회운동가들이 형평사 창립에 나서게 된 것은 훗날 이렇게 평가되고 있습니다.

“진주에 이학찬이라는 백정이 있었다. 그는 아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몇번이나 공·사립학교에 입학시키려 했지만 백정이라는 이유로 입학을 시킬 수 없었다. 이러한 부당한 압박은 이학찬을 분격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는 이러한 사실을 진주의 덕망있는 지식인이었떤 강상호 신현수 천석구 등에게 호소 했다. 이에 뜻을 같이 한 강상호 등이 찬동해 형평사는 태동했다. (조선총독부경무국 기록, 김의환 ‘일제하의 형평운동’ 등)

 

당시 백정가족의 모습. 가죽을 널어놓은 건조장을 배경으로 서 있다.


실제로 백정일로 돈을 벌어 부유해진 어느 백정이 자신의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싶어 몇번이나 학교를 찾아가고, 학교에 막대한 기부금을 전하기도 했으나 끝내 입학이 거절되는 일도 있었습니다. 자신의 아이를 백정의 아이와 함께 학교에 다니게 할 수 없다는 학부모들의 난리에 학교에서 입학을 거절 한 것이었지요. 백정의 아이임을 숨기고 입학을 시켰다가 들통이 나면 학교를 쫓겨나기도 했습니다. 강상호 선생은 이 일에도 앞장서 백정들의 한을 조금 풀어주기도 했습니다. 백정의 자식들을 자신의 아이로 입적해 학교에 입학시킨 것이었죠. 강상호 선생의 이런 평등사상에 입각한 활동은 당시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당하기 일쑤 였습니다. 그렇지만 올바른 일을 하겠다는 강상호 선생의 의지를 꺾을 수 없었지요.

진주 기독교의 태동과 형평운동

형평운동이 시작되기 전인 1906년 진주 기독교가 처음 들어왔습니다. 그 해 9월30일, 거열휴(호주 선교사 휴 커럴, 1871~1943) 선교사가 기독교 전파를 위해 가족과 함께 진주를 찾아왔습니다.

인간평등을 외치는 기독교에 백정들도 눈을 돌렸지요. 거열휴 목사가 진주에 자리를 잡은 지 1년이 지나자 백정 2명이 기독교 신도가 되었습니다. 거열휴 목사는 예배시간에 이들을 같이 예배를 보도록 할 것이라고 전도사와 신자대표들에게 발표했습니다. 그러자 이들은 “우리가 어찌 백정과 한 자리에서 예배를 볼 것이냐”며 한마디로 거절합니다.

기독교 교리와 동떨어진 주장에 거열휴 목사는 고심했지만 전통적인 신분의식의 강한 반발을 의식해 백정신도를 다른 신도들의 눈길을 피해 자신의 사택에서 따로 예배를 보도록 했습니다.

1908년 거열휴 목사가 휴가를 얻어 귀국 한 후 새로운 목사 리알(Rev D. M. Lyall)는 이같은 별도 예배를 참지 않았고 결국 1909년 5월 백정신도들을 함께 예배보도록 합니다.

이같은 합동예배에 반발한 신도들이 예배실을 박차고 나가버리는 등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리알 목사는 뚝심있게 이 일을 밀어부쳤지만 결국 49일만에 기존 신도들의 뜻에 따르고 맙니다. 수백년 이어진 관습을 꺾지 못한 것입니다.

하지만 다시 예배를 따로 보게 된 백정들과, 일부 의식 있는 선각자들은 이 일로 백정 해방과 평등한 사회에 대한 형평운동의 불씨를 피우기 시작했습니다.

1923년 진주에서 일어난 형평사 운동은 백정 뿐만 아니라 누구나 가입할 수 있었던 인권모임이었습니다. 사원이 가장 많았을 때는 전국에 287개 분사에서 3만2000여명의 사원이 활동했을 정도의 규모를 자랑했습니다. 형평사 운동은 조선시대의 악습인 신분제도를 타파하고 새로운 평등의 세상으로 나아가자는 인권운동이었습니다.

수천년 이어졌던 계급의 핍박, 그것을 끊어내기 위해 일어섰던 백정들의 시련과 저항이 있었지만 세상을 평등하게 바로 잡는데는 얼마나 더 오랜 세월이 필요했는지 오늘날 그 역사를 되짚어 볼 뿐입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평등의 세상이 이뤄지는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항거와 투쟁이 있었는지 3·1운동 100주년, 대한민국정부수립 100주년에 함께 생각해 봅시다.


김지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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