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현의 박물관 편지[37] 반 고흐(5)
김수현의 박물관 편지[37] 반 고흐(5)
  • 경남일보
  • 승인 2019.09.19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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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가 사랑한 태양의 도시 '아를(Arles)'
 
귀에 붕대를 감은 자화상(1889)
언젠가 프랑스 남부지방 아를(Arles)에 사는 여인들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다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알퐁스 도데의 희곡 ‘아를의 여인’ 에서도 마을 제일의 미녀를 두고 부자 청년과 목장지기가 서로 싸움을 벌이지 않았던가. 물론 이 극본은 프랑스의 대표 작곡가 비제의 음악이 보태지며 더욱 유명세를 탔지만 이 지역 여인들의 미모가 출중했다는 것이 꼭 소문만은 아니었던 듯싶다. 그런데 막상 아를에 도착해 보니 어여쁜 여인들은 찾아보기 어려웠고, 중세시대 원형 극장 같이 오래된 건축물들만이 더욱 눈길을 사로잡았다.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한껏 느껴지는 이 마을 중심에는 론(Rhone)강이 흐르고 있었고, 프랑스 남부만의 강하고도 에너지 넘치는 햇살이 강물 위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아를로 간 고흐

이 뜨겁고도 생명력 넘치는 햇살은 많은 예술가들의 발길을 프로방스라 불리는 이 곳 남부 지방으로 이끌었고 빈센트 반 고흐도 그 중에 한명이었다. 혹독한 겨울나기와 바쁘고 각박한 파리 생활에 싫증이 난 고흐가 남부지방으로 발길을 돌린 것이다. 특히 밝고 진한 색상에 매료 되어있던 고흐에게 강한 해가 하루 종일 얼굴을 내 비추는 지역으로의 열망은 어쩌면 당연했을 것이다. 파리에서 술과 담배와 가까워졌던 고흐는 건강이 매우 나빠져 있었을 뿐더러 음식을 씹을 수 있는 이도 열 개가 채 남지 않았다. 그런 그의 모습을 어렴풋이 상상만 해보더라도 고흐가 아를에 살던 사람들에게 호감을 불러일으키는 이방인은 아니었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 특히 고흐가 즐겨 마신 술이라고 알려진 압생트는 독성물질이 들어 있어서 말년에 그가 남긴 노란색 위주의 작품들은 독한 성분에 의해 고흐의 시야가 노랗게 변해버린 탓이라는 추측도 있다.

고흐 스스로 왜 아를을 선택했는지에 대한 이유를 한 번도 언급한 적은 없지만 그 이유를 오늘날 우리가 찾아보는 것은 화가에게 한 발 더 다가갈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어디서든 잘 인정받지 못하고 외면 받던 그가 우리의 관심을 바란 듯하다.

 
반 고흐의 노란집이 서 있던 곳
◇고흐의 ‘노란집’은 없었다

아를에 도착했을 때 마을 사람들은 자신의 이름을 고흐라고 소개하는 그의 발음을 잘 알아듣지 못했고 고흐는 프랑스 사람들이 알아듣기 쉽도록 이름을 줄여 ‘빈센트’라고 소개했다.

고흐는 아를의 봄을 맞이하며 마치 다시는 봄을 맞이하지 못할 사람처럼 부지런히 계절을 담아냈다. 과수원의 복숭아꽃이 흐드러지게 만개한 아를의 봄은 찬란히도 아름다웠고, 고흐는 그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아마 그의 인생에서 가장 바빴던 봄이었을 것이다. 아를의 풍경은 때때로 그의 고향 네덜란드를 떠올리게 할 때도 있었고, 비록 한 번도 가보진 않았지만 그림으로만 보며 그가 동경해 온 일본의 풍경을 닮아있기도 했다.

고흐가 아를에서 가장 원했던 일은 예술가들이 한데 모여서 살며 그림을 그리고 의견을 나눌 수 있는 공동 작업실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고흐와 일면식이 있던 대부분의 화가들은 그와의 작업을 꺼렸고 합류하겠다는 화가를 찾기가 힘들었다. 그러자 화방에서 일하던 동생 테오가 고갱의 작품을 팔아주었고, 앞으로도 도움을 주기로 약속 하자 마침내 고갱이 아를행 기차를 탔다. 이 소식을 듣은 고흐는 큰 설렘과 꿈을 안고 고갱과 함께 살게 될 자신의 ‘노란집’을 단장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테오의 재정적 지원으로 고갱을 위해 가구를 들여 놓을 수 있었고, ‘해바라기’를 포함해 벽에 걸어 놓을 여러 작품들을 그렸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은 처음부터 좋지 않은 결말을 예상 했을지도 모르겠다. 두 사람의 성격은 너무도 달랐고 특히 작품에 관한 스타일이나 가치관은 더욱 그랬다. 고갱은 화가로써 아무 명성이 없던 고흐를 자신보다 한참 아래로 보았고, 고흐의 작품에 대해 항상 지적과 비판적인 견해를 내비추었다. 특히 두 화가의 작품 활동 방법이 완전히 달랐는데, 고갱은 작품을 구상하고 그릴 때 자신의 기억과 상상에 의존해 그림을 그렸다. 그 때문에 고흐보다 그림을 그리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고 실내에서 머무는 시간이 많았다. 반면 고흐는 상상하는 이미지 보다 실제로 보고 느낀 풍경을 캔버스에 담길 원했다. 그러려면 고갱과는 달리 항상 밖에서 그림을 그려야 했고 그리는 속도도 매우 빨라서 한 작품을 완성시키는데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논쟁과 부딪힘은 극에 달했고, 결국 오늘날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고흐의 귀 사건’이 이렇게 발생했다. 심한 스트레스와 신경쇠약의 기미는 고흐 스스로 자신의 왼쪽 귀의 일부를 자르도록 만들었고 이것을 마을 매춘부에게 가져다주며 마을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이후 ‘귀 사건’은 고흐보다 더욱 오래 살았던 고갱의 말에 의해 더욱 알려져 버렸기에 두 사람의 입장을 모두 들어 보지 않은 우리로써는 그 당시 상황에 대해 정확히 알기가 어렵다. 고흐는 고갱이 아를을 떠난 이후 편지만 몇 차례 주고 받았을 뿐 다시는 만나지는 않았다. 고흐가 그토록 꿈꿔왔던 남부의 공동체는 첫 동료이자 마지막 동료인 고갱이 떠남으로써 실패하고 말았다. 뭐든 마음대로 되지 않던 고흐였지만, 결국은 혼자 낯선 마을에 남아 귀에 붕대를 감고 병원에 머물러야 했던 그의 모습을 상상해보면 마음 한 켠이 애잔해진다. 아를에는 고흐의 발길이 닿았던 장소나 직접 캔버스에 옮겼던 풍경을 안내판 표시로 볼 수 있어서 1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아를에서의 그의 일상을 뒤쫓을 수 있다. 고흐와 고갱이 함께 지냈던 ‘노란집’은 그 이름처럼 샛노란 페인트나 고흐가 언급한대로 신선한 버터색을 띄고 있어 한눈에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 건물은 2차 세계 대전을 거치며 붕괴되어 그 자리에 없었다. 게다가 프랑스 남부지역의 풍부한 석회암을 사용하여 지어진 아를의 건물 대부분은 온통 노란색 외관을 뽐내고 있었다. 그러니까 아를에는 고흐의 ‘노란집’만 없었다.

 
포룸 광장의 카페
◇아를의 명작들

‘해바라기’를 포함해 ‘노란집’, ‘밤의 카페 테라스’, ‘론 강의 별이 빛나는 밤에’, ‘랑글루아 다리’, 고흐가 살아생전 판매된 유일한 작품으로 알려진 ‘아를 근교의 와인 포도밭(red vineyard near Arles)’ 등 오늘날 반 고흐의 대표작으로 여겨지는 작품들 대다수가 아를에 머물던 시기에 그려졌다. 아를 시기의 작품에는 우리네 시골에서도 쉽게 만날 수 있는 평범한 소재와 풍경이 주로 나타난다. 고흐는 자신만의 색채로 대지가 주는 수확의 기쁨을 드러냈다. 특히 이러한 느낌은 그가 사랑했던 노란색 계통으로 마음껏 표현 되었는데, 강렬한 햇볕을 상징하기도 하는 노란색은 그에게 있어 삶의 원동력이자 숨어 있는 자신의 내면을 끄집어내어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생명의 색이었는지도 모른다. 혹은 자신도 그림으로 달콤한 결실의 기쁨을 맛보고자 했던 바램을 담았던 것일까. 시간이 좀 걸리긴 했지만, 전 세계에서 전시되고 있는 작품들과 그를 만나러 아를에 온 사람들이 그 기쁨을 증명한다.

2014년 아를에 문을 연 빈센트 반 고흐 재단 미술관은 아를 시기의 고흐를 집중적으로 조명함은 물론 고흐와 연결고리가 있는 과거 및 현재 화가들을 찾아 나선다. 작품에서 발견되는 화가들의 공통점과 고흐의 영향을 받은 화가들에게서 시대를 초월하여 묻어있는 고흐의 모습을 과거와 현재를 통해 확인 할 수 있다. 이곳에서는 고흐의 작품을 네덜란드 반 고흐미술관과 크뢸러뮐러 미술관 덕분에 특별 전시로 만나볼 수 있다.

 
노란집(반고흐 미술관)
랑글루아 다리
랑글루아 다리
추수(반고흐 미술관)
프로방스의 건초더미(크뢸러뮐러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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