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현의 박물관 편지[43]루브르 박물관1
김수현의 박물관 편지[43]루브르 박물관1
  • 경남일보
  • 승인 2020.03.31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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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와 현재 어우러진 세계 최고 박물관
아무리 길을 잘 찾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루브르박물관’에서는 예외를 두어야 할 것이다.

잘 알다시피 루브르는 전 세계적으로 세 손가락에 꼽히는 방대한 규모와 컬렉션을 자랑하는 박물관이기 때문이다.

파리를 찾은 관광객이라면 루브르를 들리지 않고서는 못 베기는 그 명성과 인기 때문에 박물관 앞은 일 년 내내 관광객들로 문전성시를 이룬다. 입장을 위해 긴 시간을 인내하고 나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수 만점의 작품과 유물들이 고작 두어 시간의 관람정도만 허락하는 우리의 빡빡한 일정에 조급한 마음을 선사한다. 그러지 않더라도 루브르의 전시관은 프랑스의 역사적 인물 이름을 각각 붙인 리슐리외, 쉴리, 드농관의 세 곳으로 나누어져 있어서 대부분의 관람객들은 이 거대한 박물관의 규모에 이내 무릎을 꿇고 만다. 일주일을 꼬박 박물관에 출석 하더라도 하나의 전시관을 꼼꼼하기 보기란 쉽지 않아 보이는 이 거대한 건물은 우리의 체력과 발바닥을 남아나질 않게 한다. 이러한 이유로 루브르 박물관에 갈 때는 유명한 작품을 모조리 섭렵 하겠다는 욕심 보다는 꼭 보고 싶은 작품들을 사전에 선택하여 관람실을 알아 본 다음 동선을 미리 파악하여 이동하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다.

 
루브르박물관 전경.
◇루브르의 역사

파리의 심장부에 위치한 루브르는 처음부터 박물관을 목적으로 건설 된 건물이 아니었다.

루브르의 역사는 12세기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루브르는 본래 군사적 방어 구실을 하던 성으로 그 쓰임새를 유지하다가 14세기에 들어서면서 파리와 왕실의 주요 심장부로써의 기능을 했다. 앙리 2세의 죽음이후 권력을 장악한 카트린의 통치기에는 루브르궁 옆으로 튈를리 궁과 거대한 정원이 건설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루브르궁은 루이 14세 때에 왕의 거처가 베르사유로 이전되면서 텅빈 궁으로 남게 되었다. 18세기에는 여러 교육기관이 들어섰으며 왕실을 위해 일하는 하인들과 예술가들을 위한 숙식제공의 장소로 사용되기도 했다. 특히, 이 시기에는 계몽주의의 일환으로 예술을 대중들에게 공개해야 한다는 의견이 지속적으로 거론 되면서 루브르 궁 중심의 갤러리가 문을 열기도 했다.

루브르 박물관이 현재와 같은 모습을 지닐 수 있었던 데에는 나폴레옹의 역할이 컸다. 나폴레옹은 루브르궁을 자신의 거처로 삼으면서 카루젤 개선문을 건립하고 나폴레옹 광장을 완성 했다. 또한 전쟁을 통해 지배하게 된 나라의 중요한 유물들을 전리품처럼 루브르로 옮기면서 왕실 소장품을 계속해서 확장해 나갔다. 급기야 나폴레옹은 이 컬렉션에 자신의 이름을 붙여 나폴레옹 박물관이라고 칭하기에 이르렀다. 1871년 튈를리 궁은 화재로 대부분 전소되면서 현재는 궁전의 터만 남아 있는 상태다. 근대에 이르러 루브르 박물관의 외관이 가장 획기적으로 변한 부분은 현재 루브르 박물관의 상징이 된 유리 피라미드 조형물이다. 이 피라미드는 1989년 중국계 건축가인 I.M.Pei를 중심으로 건설되었으며, 유리를 통해 반사되는 빛을 통해 낮과 밤의 다른 루브르 박물관의 외관을 감상 할 수 있다. 파리를 보호하기 위해 건설한 방어적 기능의 요새를 시작으로 왕의 권력을 과시 할 수 있는 왕궁으로써의 역할도 담당했던 루브르는 현재 전 세계를 대표하는 박물관으로써 자리매김했다.

 
모나리자
◇루브르의 스타 ‘모나리자’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은 어떤 그림일까? 세상에는 우리의 눈을 사로잡는 그림들이 셀 수 없이 많지만 세상 사람들이 모두 알만한 그림을 딱 한 장 골라보기란 그리 쉽지 않아 보인다. 그렇다면 긴 생머리에 눈썹 없는 그 여인의 초상은 어떨까?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모나리자'라면 그 질문을 충족시킬 만한 대중성과 인기를 가지고 있지 않나 싶다. 모나리자는 다른 그림들과 같은 전시공간을 사용하다가 한 일본 대기업의 도움으로 현재는 넓은 전시실을 거의 독점적으로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루브르에 왔으면 모나리자를 보고 가야지! 하는 관람객이 한둘이 아닌지라, 드농관 전시실에는 늘 발 디딜 틈이 없다.

그런데 어쩐지 그토록 보고 싶어 하던 모나리자와 맞닥뜨린 관람객들은 마냥 기쁨과 황홀한 표정만을 비치지 않는다. 오히려 그림을 감싸는 유리막이 관람을 방해한다는 느낌과 생각보다 작은 그림의 크기 탓에 열심히 전시실을 찾아온 다리에 힘이 풀리는 듯하다. 46만점 이상의 작품을 보유하고 있는 루브르에서 모나리자를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 내세우다 보니 이 모나리자는 박물관 상점의 진열대에서도, 파리 시내 기념품 가게에서도 쉽게 만나볼 수 있지만 우리는 이 여인의 초상에 관해 의문점도 품게 된다. 모나리자는 어떻게 루브르박물관을 대표하는 그림이 되었을까? 이 그림의 어떤 매력이 전 세계인들의 기억속에 스며든걸까?

이 그림의 주인공으로 지목되고 있는 여성은 피렌체의 상인이었던 프란체스코 델 지오콘도의 부인인 리자이다. 리자는 15살에 지오콘도와 결혼을 했고, 몇 년 후 부부는 큰 저택을 구입하게 되었는데 이 즈음에 지오콘도의 요청으로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리자의 초상화에 착수 한 것으로 추측된다. 시간상의 리자는 23살의 꽃다운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그림 속의 리자는 그보다 훨씬 더 나이 들어 보인다. 제작된 그림은 주문한 이에게 전달되는 것이 마땅하지만, 이 그림은 지오콘도의 부부에게 끝내 배달되지 않았다. 다빈치가 그림을 완성 하지 않은 채 미완성의 그림을 들고 프랑스로 건너 가버렸기 때문이다. 들리는 소문에는 그림 속의 인물이 리자와 하나도 닮지 않아서 이들 부부가 그림을 거절 했다는 설도 있다. 그림을 완성하지 못해서 프랑스로 들고 왔든, 지오콘도의 거절로 다빈치의 손에 남아 있었든 1519년 다빈치가 프랑스에서 세상을 떠나며 남겨진 그의 소유물 목록에는 이 그림 남아 있었다. 이것이 모나리자가 이탈리아를 떠나 루브르 박물관에 걸려 있는 이유다.



◇모나리자만의 특별함

많은 이들에게 다빈치의 명작을 만났다는 기쁨보다는 실망감을 안겨주는 모나리자이지만, 이 그림이 오랫동안 사람들의 뇌리를 스치는 이유에는 이 그림만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무언가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모나리자 이전의 초상화에서는 웃는 모습을 찾아 볼 수 없었다. 즉 사람의 감정을 나타내는 표현을 극도로 자제했던 것이다. 그러나 모나리자는 어떠한가? 비록 하얀 이는 드러내지 않았지만 슬며시 드러나는 여인의 미소에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따라 올라간다. 또한 이 여인의 얼굴에는 눈썹이 없다. 그녀의 긴 생머리에는 짙은 눈썹이 어울렸을 법하지만 눈썹이 있어야 할 부분은 휑하니 비어있다. 눈썹의 부재와 여인 뒤에 나타난 배경도 좌우 대칭이 맞지 않는 점 때문에 이 그림이 미완성일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낳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는 이로 하여금 여인의 미소와 그 자태의 오묘한 매력에 빠지게 되는 것은 다빈치가 사용한 스푸마토 기법 때문이다. 이 표현법은 선을 뚜렷하게 드러내지 않아 사물의 윤곽을 흐릿하고 모호하게 만들어 처리함으로써 더욱 자연스러움을 더하고 사실적으로 보이는 효과를 나타낸다.

1911년, 모나리자가 본의 아니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사건이 하나 있었다. 루브르 전시실에서 감쪽같이 사라진 모나리자는 약 2년 동안이나 그 자취를 감추었는데 그러는 동안 6점의 위작이 부호들에게 밀거래 되었다. 특정 용의자로 우리가 알고 있는 입체파 거장 피카소도 포함 되어있었다는 점이 흥미롭다. 당시 피카소는 루브르의 도난품을 네 점이나 구입한 과거 이력 때문에 용의선상에 올랐던 것이다. 그러나 실제 모나리자를 훔친 범인은 이탈리아 출신이자 루브르 박물관의 인부로 일했던 빈센초 페루자로 드러났고 그는 2년 동안 그림을 자신의 침대 밑에 보관했었다고 고백했다. 어쨌거나 이 사건으로 모나리자의 명성과 인기는 더욱 치솟게 되었으니, 무사히 제 집으로 돌아와 인기까지 거머쥔 이 여인의 운도 보통이 아니다.

루브르의 스타를 탄생시킨 화가 역시 보통을 넘어 선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15세기 말 피렌체를 중심으로 한 르네상스 예술을 대표하는 화가지만 그는 거의 모든 학문에 능통했던 천재였다. 신은 그에게 그림 실력뿐만 아니라 건축학, 해부학, 수학, 식물학, 지질학, 토목공학, 기계공학 등에도 비범한 능력을 부여했다. 아마 다빈치 본인도 수많은 분야를 다루면서 머리가 꽤나 아팠을 듯하다. 67세의 삶을 살았던 다빈치가 남긴 그림이 겨우 스물 여점 인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듯 그는 인생 전부를 그림에만 쏟아 붓지 않았다. 한편 루브르 박물관에서는 다빈치의 또 다른 걸작 ‘라 벨 페로니에르’, ‘암굴의 성모’ 등도 만나 볼 수 있다.



홈페이지: https://www.louvre.fr/en

주소: Rue de Rivoli, 75001 Paris, 프랑스

관람시간: 09:00-18:00(요일마다 상이), 화요일 휴관

입장료: 15유로,18세 이하 무료





 
암굴의 성모
라 벨 페로니에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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