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왕봉] 그믐날 엽서
[천왕봉] 그믐날 엽서
  • 경남일보
  • 승인 2020.12.30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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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모 (논설위원)
서녘 하늘가에 놀이 붉다. 황도 한 바퀴를 다 돈 태양이 영원의 함지(咸池)로 드나보다. 그 수채화 번진 허공에 겨울새 한 무리 줄지어 날아간다. 되돌릴 수 없는 세월의 은유인가. 길 위의 차량들은 긴 불빛의 띠를 이루고, 사방에 깔리는 어둑발이 먼 산 공제선(空際線)을 어슴푸레 덮는다. 새도 사람도 깃들 곳으로 돌아가고 있다. 그래야 할 시각이다.

▶묵은 달력을 걷으며 스스로 묻는다. 앞만 보고 달려온 열두 달, 무엇을 얻고 채웠는가. 허망감이 몰려든다. 혹여 채워야 할 건 못 채우고 비워야 할 것들만 붙들고 있지는 않은가. 그렇다 해도 탄식할 일 아닐 터. 삼백육십 일 내내 코로나 일상의 불안한 공기 들이마시며 살아냈지 않은가. 이보다 더한 채움이 달리 또 있으랴.

▶역질(疫疾) 난장에 열두 달을 보내고 그 공포 끝나지 않은 판에 또 해가 바뀐다. 아등바등 이룬다고 이룬 것들이 돌아보면 부질없는 헛것! 누구에게나 똑같이 덮쳐오는 해넘이 정서다. 하지만 세밑 허무감에 한없이 젖어 있을 일은 아니다. 내일이면 새 햇살이 머리 위를 비출 것이다. 그 빛 듬뿍 받으며 또 한번의 새 희망은 솟아나리라.

▶지금은 그 희망 곱게 다듬을 시간. 꿈이 비록 사흘을 못 넘길지라도 우리는 다시 한번 그 꿈 소담스레 쟁여야 한다. 괴질 횡행에 이아쳐 새날 같지 않은 새날 앞둔 오늘, 그믐날에 이 팔백 자 ‘천왕봉’을 엽서 삼아 새해 희망 한가득 전하고 싶다. ‘천왕봉자는 묵은해 보낼게요, 독자님은 찬란한 새해 맞으십소서.’ 제구포신(除舊布新)!
 
정재모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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