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정인의 에세이 픽션을 입는다] (6)보는 눈 듣는 눈
[배정인의 에세이 픽션을 입는다] (6)보는 눈 듣는 눈
  • 경남일보
  • 승인 2022.02.08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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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가 새로워지는 것은 새로운 문화가 창달됨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새로운 문화는 새로운 물결에서 만들어진다는 말은 틀리지 않습니다. 문제는 받아들일 수 있는 바탕이 있어야 한다는 거지요.

이 땅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들어온 지는 오래오래 됐지만, 1886년에야 선교가 허용되었는데요, 그리스도교의 찬송가가 퍼지면서 태어난 것이 ‘창가唱歌’이며 창가에서 ‘신시新詩’로 흘렀다 합니다.

-대조선국 인민들아/ 이사 위한 애국 하세/ 충성으로 님군 섬겨/ 평안 시절 항복하세/ 경사로다 경사로다/ 상하 없이 우리 동포- 1896년, 한글로 발행된 독립신문에 실린 이용우의 ‘애국가’라는 창가는 시작이 이렇습니다. 십 년 뒤, 1908년, 우리나라에서 처음 나온 잡지라는 ‘少年소년’에 실린 신시新詩의 첫발로 보는 최남선의 ‘海해에게서 少年소년에게’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처…ㄹ 썩 처…ㄹ썩, 척 쏴…아/ 따린다 부슨다 문허바린다/ 泰山태산같은 높은뫼 집채같은 바윗돌이나 요것이 무어야 요게 무어야/ 나의 큰 힘 아느냐 모르느냐 호통까지 하면서 / 따린다 부슨다 문허바린다./ 처…ㄹ썩 처ㄹ썩 척 튜르릉 꽉.-

또 십 년 뒤인 1919년, 처음 보는 자유시라는, 문예지 창조에 실린 주요한의 ‘불노리’는 이래요.

-아아 날이 저믄다, 西便서편하늘에, 외로운 江물 우에, 스러져가는 분홍빗 놀…… 아아 해가 저믈면, 해가 저믈면, 날마다 살구나무 그늘에 혼자 우는 밤이 또 오건마는,-

1921년에는 김억의 번역시집 ‘오뇌의 무도’가, 1925년엔 김소월의 시집 ‘진달래꽃’이, 그 이듬해엔 한용운의 시집 ‘님의 침묵’이 나왔습니다.

-까치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 우리우리 설날은 오늘이래요- ‘설날’이나 -낮에 나온 반달은 하얀 반달은 햇님이 쓰다 버린 쪽박인가요-하는 ‘낮에 나온 반달’ 같은 창작동요도 1924년을 전후해서 나와 있습니다.

소설은 늦지요. 만세보에 실린 신소설이라는 이인직의 ‘혈의 누’는 1906년에, 매일신보에 얼굴을 내민 장편소설 이광수의 ‘무정’은 1917년에, 김동인의 ‘감자’가 조선문단에 나온 건 1925년이라니.

수필이라는 이름으로 에세이가 얼굴을 내밀기도 전에 시와 소설은 이렇게 숨 가쁘게 달리고 있었습니다. 만약에, 만약에 말입니다. 조선이라는 나라가 아직 그대로 있어 왕을 모셨더라면, 한자가 칼자루를 쥐고 있었다면, 이토록 신나는 말꽃을 피울 수 있었을까? 지금도 왕을 모시는 조선 백성으로 우리가 살고 있다면, 나는 에세이스트가 되었을까? 나랏글이 지금도 한자라면 이 나라 백성인 나는 과연 한문으로 ‘글’이라는 걸 쓰고 있을까? 나는 이런 망상을 가끔 해봅니다.

글을 쓴다는 것은 말을 적는 거지요. 한글이 있음에 감사드립니다. 내 말을 마음껏 적을 수 있는 우리 글자가 있다는 것, 그지없는 행복이 이 가운데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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