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정인의 에세이는 픽션을 입는다 (23)보는 눈 듣는 눈
배정인의 에세이는 픽션을 입는다 (23)보는 눈 듣는 눈
  • 경남일보
  • 승인 2022.06.14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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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월에 돌아보는 오월은 더 눈부십니다. ‘아아, 님은 갔습니다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괜히 떼쓰고 싶지요. 실로 글 지이에게 오월은 말꽃을 피우게 하는 마력을 지닌 달이지요.

“청자빛 하늘이/ 육모정 탑 위에 그린 듯이 곱고/ 연못 창포 잎에/ 여인네 맵시 위에/ 감미로운 첫여름이 흐른다.” 노천명이 소프라노로 ‘오월’을 노래하니까, 이양하 선생이 신록을 예찬합니다.

“우리가 비록 빈한(貧寒)하여 가진 것이 없다 할지라도 우리는 이러한 때 모든 것을 가진 듯하고, 우리의 마음이 비록 가난하여 바라는 바 기대하는 바가 없다 할지라도 하늘을 달리고 녹음을 스쳐오는 바람은 다음 순간에라도 곧 모든 것을 가져올 듯하지 아니한가.” 그래서

“어떻게 하라는 말씀입니까/ 부신 초록으로 두 눈 머는데/ 진한 향기로 숨 막히는데/ 마약처럼 황홀하게 타오르는/ 육신을 붙들고/ 나는 어떻게 하라는 말씀입니까?” 오세영의 ‘오월’이 몸을 앓습니다. 그런 날 김현승 시인은 ‘오월의 그늘’에 젖습니다.

“그늘/ 밝음을 너는 이렇게도 말하는구나/ 나도 기쁠 때는 눈물에 젖는다.” 시인의 가슴은 언제나 눈물 같은 것, 이문희 시인이 ‘오월의 시’에 살아서는 이루지도 못할 소망을 새깁니다.

“토끼풀꽃 하얗게 핀/ 저수지 둑에 앉아/ 파아란 하늘을 올려다보면/ 나는 한 덩이 하얀 구름이 되고 싶다.” 창밖은 오월인데……. 금아 선생이 창밖을 보고 있습니다.

“창밖은 오월인데/ 너는 미적분을 풀고 있다/ 그림을 그리기에도 아까운 순간/ 라이락 향기 짙어가는데/ 넌 아직 모르나보다/ 잎사귀 모양이 심장인 것을.”

금아 피천득 선생님이 살아 계실 제 제가 선생님께 여쭤본 적이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쓰신 글 중에 어느 글이 젤 마음에 드십니까?’ 그때 선생님은 서슴없이 “오월이지, 난 오월이 좋아.” 아련히 그리움 배이는 미소를 지었습니다. 선생님은 오월 스무아흐렛날 나시고, 오월 스무닷새에 가셨으니, ‘오월’을 사랑한 선생님은 어쩌면 오월의 아바타였는지 모르겠습니다.

“오월은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한 살 청신한 얼굴이다. 하얀 손가락에 끼어있는 비취가락지다. 오월은 앵무와 어린 딸기의 달이요, 오월은 모란의 달이다. 그러나 오월은 무엇보다도 신록의 달이다. 전나무의 바늘잎도 연한 살결같이 보드랍다.

스물한 살이 나였던 오월, 불현듯 밤차를 타고 피서지에 간 일이 있다. 해변가에 엎어져 있는 보트, 덧문이 닫혀있는 별장들, 그러나 시월같이 쓸쓸하지 않았다. 가까이 보이는 섬들이 생생한 색이었다.

得了愛情痛苦/ 失了愛情痛苦.

젊어서 죽은 중국 시인의 이 글귀를 모래 위에 써놓고, 나는 죽지 않고 돌아왔다. 신록을 바라다보면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즐겁다. 내 나이를 세어 무엇하리. 나는 지금 오월 속에 있다. 연한 녹색은 점점 번져가고 있다. 어느덧 짙어지고 말 것이다. 머문 듯 가는 것이 세월인 것을. 유월이 되면 ‘원숙한 여인’ 같이 녹음이 우거지리라. 그리고 태양은 정열을 퍼붓기 시작할 것이다. 밝고 맑고 순결한 오월은 지금 가고 있다.”

너도나도 우리는 가고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오월 속에 있고 싶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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