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일춘추]남명 선생의 주안상을 그리다
[경일춘추]남명 선생의 주안상을 그리다
  • 경남일보
  • 승인 2023.02.09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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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영 (한국음식문화재단 이사장, 이학박사)

 

1558년 그해, 지리산을 유람한 남명 선생 일행은 자주 술잔을 기울였다. 산에서 술자리는 대체로 유쾌했으며 선현들을 생각하며 공감을 나누는 시간이었다.

진주가 배출한 당대 최고의 지식인 남명의 주안상을 그려보는 것은 가슴 벅찬 일이다. 봄, 지리산의 풍경과 스치는 산꽃 향, 그리고 제철 음식으로 차리는 16세기 선비들의 지리산 주안상이야말로 진주 교방음식의 새로운 시도이기 때문이다.

4월 24일, 횡포역(橫浦驛)에 이르러 남명은 과일과 말린 꿩고기를 안주삼아 추로주(秋露酒) 한 잔을 마셨다. 대숲 이슬을 받아 담는 추로주는 매화주와 함께 진주 선비들이 즐기는 술이었다.

진주는 대나무 열매인 죽실을 먹고 자란다는 봉황의 전설이 깃든 곳이다. 봉황이 사는 곳은 인재가 끊이지 않는다 했다. 진주는 정승만 9명이나 배출한 인재의 산실이었다.

1619년 문신 박여량도 지리산에 올라 추로주를 마시고 일출을 맞았다. 박여량은 남명을 그대로 빼닮은 내암 정인홍의 수제자였다. 박여량은 남명이 마지막에 은거한 덕산을 바라보며 ‘천길이나 되는 봉우리 위에서 선생의 크게 은둔하신 기상을 바라보니 또 천 개의 봉우리를 보는 격이다’라고 소회를 적었다.

남명이 안주로 드신 꿩고기는 말린 생치포다. 꿩은 경상도의 진상품이었다. 수령들은 진상할 수량을 맞추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매로 잡은 꿩은 상처가 있어 백성들이 손으로 잡은 것이라야 진상품이 됐다.

꿩고기를 칼로 저며 메밀가루를 묻힌 생치처비, 생치만두 같은 것들은 양반만 먹을 수 있는 특별한 음식이었다. 냉장고가 없었지만, 생과일을 저장해 이듬해 봄까지 먹었다. 뽕나무 재를 항아리에 담아 과일 꼭지가 밑으로 오게 놓고 항아리를 진흙으로 봉해 얼지 않게 묻어두었다. 인절미에도 꿀과 과일채를 입혔다. 밤, 대추, 그리고 곶감채를 넣은 잡과편이다. 진주의 주안상에는 떡이 오르는 게 특징이다. 남명의 주안상에 잣을 꿀로 졸여 작게 썰어낸 고소한 백자병, 더덕을 꿀에 담가 쌀가루를 입혀 쪄낸 향긋한 더덕병을 차려본다. 달걀에 진말(밀가루)을 살짝 섞어 장국에 말아낸 16세기 계란면도 부담스럽지 않게 드실 수 있는 좋은 탕이 될 것 같다. 철쭉이 만발했을 500여 년 전 지리산, 남명의 순례길을 따라가 칼 찬 선비 앞에 따뜻한 주안상을 들여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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