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화 시인·진주문인협회 감사
우연히 빈센트 반 고흐의 모작 한 점을 선물 받았다. 사무소 책상 앞에 걸어 두고 매일 끝없는 황금 들녘을 거닐며 추수하는 꿈을 꾼다. 1888년에 그린 ‘수확’ 이란 작품이다. 물론 밀밭이 소재라서 계절은 여름이다. 병색이 짙은 고흐가 프랑스 아를의 광활한 밀밭을 바라보고 삶의 활력을 얻어 단숨에 붓을 움직였을 풍요롭고 생동감 있는 작품이다.
천재 화가는 아주 만족했다. 남은 생의 한 방울까지 짜 내어 ‘수확’을 완성해 놓고 동생 테오에게 완전히 다른 것들을 압도할 그림이라며 스스로 감동했다. 그림 속, 밀을 베는 농부나 수확한 밀을 마차에 싣는 농부의 두 팔에도 푸른 힘줄이 솟았을 것이다. 농부의 얼굴은 또렷하지 않으나 기쁨이 넘치고 또 가족과 함께 수확의 감동을 나누지 않았을까.
쌀밥의 힘은 대단했다. 눈앞에 흰 쌀밥이 어룽거려 틈만 나면 엄마대신 남동생과 자동차로 20분 거리를 걸어 논에 물을 대러가곤 했다. 한번은 동생이 다리가 아프다고 돌아오는 도중 주저앉아버렸다. 아버지가 일하고 돌아올 시간인데 참 난감했다. 달래다 걷다 허기져 돌아오니 식구들이 어둑한 동네 어귀에서 흩어져 우리 남매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모든 상황을 알아버린 아버지는 밤하늘에 하얀 장미 담배연기만 뿜어댔다.
수확하는 날, 마차에 나락을 싣고 돌아오는데 달빛이 부서져 밤길이 하나도 어둡지 않았다. 마루 끝에 그득하게 쟁여놓은 나락 가마니를 보며 일등 성적표를 책가방에 넣고 올 때처럼 벅차서 보고 또 봤다. 아버지 바람대로 배를 모으는 바람에 처음이자 마지막 수확의 기쁨이 됐지만 그 시절을 결코 잊을 수가 없다.
힘들게 얻은 수확은 기쁨을 넘어 감동이다. 어린 남매도 젊은 엄마도 화가도 다 알고 있었다. 아버지 몰래 저질러 놓고 간간이 속 끓이던 엄마, 그러나 둥근 두레밥상에서 흰 쌀밥을 퍼 올릴 오남매를 생각하며 더 미소 짓던 엄마. 수확의 계절이 오면 생의 마지막 지점에서 남은 열정을 송두리째 바친 천재 화가가, 왕복 60리 길을 걸어서 농사를 짓던 젊은 엄마가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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