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재남의 포엠산책(108) 12월(강연호)
강재남의 포엠산책(108) 12월(강연호)
  • 경남일보
  • 승인 2023.12.17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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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12월 너로 인한 그리움 쪽에서 눈 내렸다

마른 삭정이 긁어모아 군불 지피며

잊으리라 매운 다짐도 함께 쓸어 넣었지만

불티 무시로 설마 설마 소리치며 튀어올랐다

동구 향한 봉창으로 유난히 風雪 심한 듯

소식 갑갑한 시선 흐려지기 몇 번

너에게 가는 길 진작 끊어지고 말았는데

애꿎은 아궁이만 들쑤시며 인편 기다렸다

내 저어한 젊은 날의 사랑

눈 내리면 어둠도 서두르고 추억도 마찬가지

멀리 지친 산빛깔에 겨워 자불음 청하는

불빛 자락 흔들리며 술기운 오르던 허구한 날

잊어라 잊어라 이 숙맥아, 쥐어박듯이

그해 12월 너로 인한 그리움 쪽에서 눈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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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12월은 거리마다 크리스마스 캐럴이 울려 퍼졌어요. 대형 유리창엔 꼬마전구를 단 상점이 즐비했고요. 마법의 나라인 듯 반짝이며 사람들 걸음을 불러들였죠. 빨간 외투에 흰 목도리 두른 우리는 항남 1번가를 누볐어요. 명성레코드 앞에서 만나 이문당서점에 들러 시집을 사고 신생당에서 뜨거운 우유를 마시며 언 몸을 녹였어요. 펜팔을 하던 언니에게 서울 사는 남자친구가 찾아왔던 것도 12월이었어요. 동네 부끄럽다며 선물로 들고 온 케이크를 그대로 엎어버린 엄마의 서슬푸른 얼굴도 떠올라요. 갓 스물인 딸에게 남자친구는 우리 집의 허용 범위에 들어있지 않았던 거죠. 그날 이후로 더 엄격해진 엄마는 언니에게 얼마나 큰 압박이었을까요. 산 빛깔에 겨워 졸음 청하는 불빛처럼 흔들렸을 언니의 젊은 날 사랑이 애틋해서 저리네요. 이만큼의 시간이 지나 맞는 12월은 왠지 공허로 가득해요. 외로움과는 다른 심리적 결핍이 느껴져요. 종이에 한 글자씩 눌러쓰는 12월에서 설마설마 소리치며 불티가 튀어 오르는 것 같아요. 12월은 그런 것 같아요. 꽉 찬 것 같으면서 텅 비어있는 것요. 그래서 12월을 침묵하는 달이라고도, 무소유의 달이라고도 하나 봐요. 물질적 풍요와 행복에는 닿지 못할 거리가 있다는 걸 이렇게 알아갑니다. 그럼에도 누군가의 그리움 쪽으로 눈은 또 내릴 거예요. 이게 우리가 힘을 내어 새로운 해를 맞을 이유이기도 했으면 좋겠어요.

통영문학상운영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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