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재남의 포엠산책(112)평상(박정수)
강재남의 포엠산책(112)평상(박정수)
  • 경남일보
  • 승인 2024.03.10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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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빌리자면, 저 모퉁이 어디

반쯤 허물어진 담장 너머

오동나무 아래엔 평상 하나 있었지

그 평상 보라꽃 이야기들의 사랑방이었지

칠월 먹장구름 장대비에도

씨알 굵은 구름의 사연들을 담아내곤 했지

기나긴 오후의 물컹한 무게를 지탱하고 있어야 했지

따가운 햇살에 젖은 몸 말리다가 다리라도 쩍 갈라지면 어쩌나

속 모르는 오동나무만이 평상 위가 편평한지

자꾸만 제 그늘을 넓혔지

불어 오른 개울을 건너온 장씨의 자전거 툭, 기대어 서고

며칠 안 보이던 아랫집 김씨의 서울 나들이가

거드름피우며 들어서던

크지도 작지도 않은 평상 하나

초저녁 어스름 속으로 쭐렁이는 소주병이 깃든 건

장마가 끝자락에 걸린 어느 하루의 풍경이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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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상이라는 말엔 다정이 깃들어 있는 것 같아요. 시골집 아래채에는 평상이 있었는데요. 거기가 제 놀이터였어요. 책을 읽을 때도 낮잠을 잘 때도, 저의 일상은 거의 평상에서였어요. 찐 옥수수를 먹었고 익어가는 감을 보며 시를 썼던 날에도 저는 평상과 한 몸으로 있었어요. 그때의 하늘은 높고 푸르렀고 꿈꾸기에 알맞은 바람이 불었어요. 미래가 예측 가능해서 불안할 일이 없었죠. 집의 궂은일을 맡아 하시던 용팔이 아재는 봄이면 평상에 니스를 칠했어요. 마를 때까지 저쪽에 가 있으라는 말을 듣지 않고 햇볕이 닿은 결마다 니스칠로 반짝이는 평상 주변을 맴돌았죠. 그러다가 호기심에 손가락을 대면 덜 마른 평상에 지문이 남곤 했어요. 다음 해 봄까지 남아 있는 지문을 보면서 어쩐지 비밀일기를 써놓은 것 같은 기분이 들어 혼자 설레기도 했죠. 지금까지 주택을 버리지 못하는 건 평상에 대한 그런 태생적 고집에서인 듯싶어요. 지금 시골집은 부모님도 용팔이 아재도 모두 돌아가시고 평상도 없어졌어요. 그럼에도 위안이 되는 건 이웃집 할머니 댁 길가에 평상이 있다는 거예요. 동네 할머니들이 사사로이 이야기 나누는 사랑방인 셈이죠. 곳곳에 마른 금이 보이는 평상은 할머니들과 같은 세월을 살아 냈을 겁니다. 그러는 동안 얼마나 많은 비와 바람과 먹장구름이 다녀갔을까요. 시간의 물컹한 무게를 지탱하느라 초췌해진 평상은 사람의 모든 날 모든 풍경을 담고 있어요. 어느덧 사람과 같아지고 있으면서요. 통영문학상운영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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