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일춘추]봄밤의 골목길 걷기
[경일춘추]봄밤의 골목길 걷기
  • 경남일보
  • 승인 2024.03.31 18:4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정두경 갤러리 DOO 대표
정두경 갤러리 DOO 대표


나는 오래 전부터 동네 골목길 걷는 것을 좋아했다. 진주 비봉산 아래 봉알자리 부근 주택가는 나지막한 슬래브 지붕의 단층 양옥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고 드물게는 이층집들이 들어서 있었다. 골목길을 걷다 보면 이름 모를 사람들의 삶을 짧은 편린으로 상상하는 재미에 빠지게 된다. 각자만의 서사를 간직하고 사는 집들은 호기심을 발동시켰고 정겨웠다. 집과 집으로 이어지고 집과 집이 마주보고 있는 골목길을 걸으면서 온갖 상상과 상념에 사로잡혔다. 저마다 다른 대문의 색깔과 모양으로 그 집에 사는 사람들을 나만의 방식으로 그려나간다. 담을 넘어 고개를 내밀고 피어난 꽃들, 담벼락에 올려진 올망졸망한 작은 화분들, 담 너머로새어 나오는 어른들의 말소리, 웃음 소리, 아이들의 울음소리와 집안의 그릇들이 부딪히는 소리들, 골목길은 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켜켜이 쌓인 시간 속에 녹아있는 이야기들을 풀어놓는다.

골목길 걷기 중 최고는 봄밤의 골목길 걷기이다. 밤이 되면 낮 동안 부유하던 세상의 온갖 풍경과 소란스러운 빛깔이 고요히 가라앉고 봄의 꽃들이 오롯이 제 향기를 내며 봄밤의 부드러운 바람에 실려 골목길을 가득 채우곤 했다. 모퉁이를 돌 때마다 훅 끼치며 코끝을 간질이던 농밀한 꽃향기에 사로잡혀 골목길을 거닐던 시절이 그립다.

걷기는 건강한 몸을 만들고 싶어 하는 현대인들의 일상에 깊숙이 파고들어 누구나 걷기의 건강학을 잘 알고 있다. 심박동을 높여 심장을 튼튼히 만들고, 다리의 근육을 키우고, 다이어트에도 도움을 주는 빠르게 걷기도 좋지만 때로는 천천히 여유 있는 걷기를 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일상의 분주함을 잠시 멈추고 느리게 골목길을 걷는 사색의 시간은 명상에 다름 아니다.

프랑스스트라스부르 대학 사회학과 교수 다비드 르 브르통은 그가 쓴 ‘걷기 예찬’ 에서 걷기는 자기 몸의 감각을 깨우고 단련시키는 ‘능동적 형식의 명상’이라고 했다. 그의 걷기 예찬에 따르면 걷는다는 것은 세계를 온전하게 경험한다는 뜻이다. 느리게 걸어야만 가능한 이야기가 아닐까..

바야흐로 봄이다. 오랜 기다림 끝에 꽃망울을 터뜨린 하얀 목련이 등불을 켠 듯 봄밤을 밝히고 서있는 골목길을 걸어보자. 천천히 걷다 보면 우리가 걸어온 길, 앞으로 걸어가야 할 길이 보일지도 모른다. 좁은 골목길에서 내밀한 느낌으로 맞이하던 그 시절과는 사뭇 다르지만 아직도 봄밤의 골목길 걷기는 ‘봄밤’이라고 가만히 발음할 때마다 느껴지는 미몽과 아스라함 사이로 꽃향기와 바람이 뒤섞여 언제나 매혹적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경상남도 진주시 남강로 1065 경남일보사
  • 대표전화 : 055-751-1000
  • 팩스 : 055-757-1722
  • 법인명 : (주)경남일보
  • 제호 :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 등록번호 : 경남 가 00004
  • 등록일 : 1989-11-17
  • 발행일 : 1989-11-17
  • 발행인 : 고영진
  • 편집인 : 강동현
  • 고충처리인 : 최창민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지원
  • 인터넷신문등록번호 : 경남, 아02576
  • 등록일자 : 2022년 12월13일
  • 발행·편집 : 고영진
  •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gnnews@gnnews.co.kr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