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에서 포도나무 넝쿨이 뻗고 있다
돌 위로 포도나무 넝쿨 그림자가 내리고 있다
내리는 공간이 보슬비 내리는 때처럼 가볍다
나는 너에게서 온 여름 편지를 읽는다
포도나무 잎사귀처럼 크고 푸른 귀를 달고 눕고 싶다
이런 얇고 움직이는 그림자라면 얻어 좋으리
오후에는 돌 위가 좀 더 길게 젖었다
포도나무 잎사귀처럼 너는 내 속에서 자란다
여름에게서 온 편지를 읽습니다. 포도나무 넝쿨의 얇고 푸른 그림자가 배경이니 이보다 알맞은 장소가 어디 있겠어요. 포도 넝쿨 그림자 내리는 공간이 보슬비 올 때처럼 가벼워요. 보폭은 또 얼마나 고요한지요. 그러하니 편지를 읽는 내내 가득한 행복이겠습니다. 하지만 행복은 알지 못하는 쓸쓸함을 동반하는 것 같아요. 이런 쓸쓸함이 곰삭으면 아름다움으로 치환되려나요. 생의 희비가 포도에서 연상되는 보랏빛으로 읽히니 말이에요. 파랑의 차가움과 빨강의 열정을 섞었으니 화려한 기쁨도 한탄할 설움도 없이 적절하게 매혹적인 생의 빛깔이 보이는군요. 이즈음에서 크고 푸른 귀를 단 그림자 한 벌 나도 얻을까 봐요. 그러면 세상을 대하는 태도가 한결 깊을 텐데요. 제 외갓집 뒤뜰에도 포도나무가 있었어요. 담을 둘러싸고 줄지어 선 포도밭엔 여름이면 시고 달달한 포도가 주렁주렁 열렸었죠. 햇살 받은 포도는 투명해질 대로 투명해져 씨가 다 보였어요. 외사촌 언니 따라 포도밭에 숨어들어 송이째 따서 먹었던 기억이 아련해요. 그때 우리가 먹었던 건 분명 포도였는데, 지금 생각하니 크고 푸른 포도나무 잎사귀 그림자도 같이였던 듯싶어요. 자연과 동화된 우리가 거기 있었던 거예요. 여름에게서 온 편지에는 오랜 세월 서정의 원리가 꿈꾸어온 이상이 적혀 있는 것 같아요. 현생인류가 궁극의 지향으로 삼아야 할 철학적 지표가 분명 쓰여 있을 거예요. 그 속에서 사유하고 고민하는 우리가 있지 않을까 싶어요. 통영문학상운영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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