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일칼럼]꽃이 지고 있습니다
[경일칼럼]꽃이 지고 있습니다
  • 경남일보
  • 승인 2024.04.09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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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영 경남도립남해대학 교수
김은영 경남도립남해대학 교수


쟁쟁쟁. 꽃 지는 소리. 꽃이 종소리 울림 하며 진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유치환의 ‘낙화’ 시를 처음 읽었을 때였다. ‘뉘가 눈이 소리 없이 내린다더뇨, 이렇게 쟁쟁쟁 무수한 종소리 울림 하며 내리는 낙화’라는 구절로 시작하는 그의 시는 사춘기 이후 매년 봄꽃 떨어지는 순간마다 현란한 종소리로 뇌리에 각인돼 왔다.

생각해보면 꽃이 피고 지는 모든 장면이 다 귀하고 아슬아슬하다. 뾰족뾰족 봉오리가 맺히는 순간, 꿀벌이 붕붕 꽃잎을 건드리는 순간, 툭 하고 봉오리가 벌어지는 순간, 그 심연으로 시간과 바람이 스며드는 순간, 그예 꽃잎이 꽃자루를 떠나 낙하하는 순간, 그 모든 순간이 너무나 짧고 찬란해서 보는 이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는다.

오래전 필자도 길거리에 떨어진 꽃잎을 보고 위로와 용기를 얻은 적이 있다. 2006년 객원교수로 태국 시나카린위롯대학교에 파견됐던 때의 일이다. 태국은 6월에 신학기가 시작되므로 5월 말경 방콕에 도착했는데, 계절상 우기가 시작된 때여서 하루에 한두 번씩 스코올이 지나간다는 말을 들었다. 첫날 캠퍼스 내 게스트하우스에 대충 여장을 풀고 잠을 청했다. 창밖에는 3층 건물 높이로 우거진 봉황수 몇 그루가 늘어서 있었고, 오래 비워둔 방 특유의 곰팡내와 진한 열대 꽃향기가 어우러져 묘한 기분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이국 생활에 대한 기대감이 반분이라면 새로운 삶에 대한 걱정이 반의 반분, 그리고 이유를 설명하기 힘든 고독감과 울적함이 나머지 가슴 한켠을 짓누르고 있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천지가 무너지는 듯한 천둥소리와 함께 쏴아 하고 장대비가 쏟아졌다. 아아, 이것이 열대몬순의 바로 그 스코올이구나! 마치 먼바다에서 양동이로 물을 길어와 퍼붓는 것 같았다. 자다 말고 복도로 뛰어나가 창문을 열어젖히고서 거리를 내다보았다. 인적 끊어진 길 위로 붉은색 봉황수 꽃잎이 빗살에 자근자근 밟히며 화액(花液)을 뿌려대고 있었다.

“나의 고독(孤獨)에 스코올과 같은 슬픔이 있다.”

그 순간 읊조렸던 박인환의 시 구절이다. 나중에 찾아본 시 원문에는 ‘나의 시간(時間)에 스코올과 같은 슬픔이 있다’라고 되어 있었지만, 이국땅에서의 첫 밤이 주는 고적함 때문이었을까, 그날 나는 나도 모르게 ‘고독’이라는 단어를 읊조리고 있었다. 빗줄기에 쓸려 땅에 떨어진 붉은 꽃잎 한 장 한 장이 마치 집을 떠나온 필자의 모습 같기도 했다. 외롭고 두려웠던 반면, 꽃잎처럼 스러져갈 한 번뿐인 삶에 대한 책임감과 용기 같은 것을 느꼈다.

지상의 모든 꽃은 단 한 번 피고 지기에 아름다운 것이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시몬느 드 보부아르가 1947년에 집필한 소설 ‘인간은 모두 죽는다’에는 1279년 이탈리아의 카르모나에서 태어난 귀족 포스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그는 우연히 불사의 영약을 마시고 불멸의 몸을 얻어 카르모나의 군주가 된다. 그러나 모험과 정복과 파괴와 건설로 점철된 700여 년 동안 결국 불멸의 삶이 저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절망하게 된다. 그가 사랑했던 모든 이가 죽어갔지만, 그는 계속 살아남았고, 그 사실은 수 세기 동안 똑같이 되풀이됐다. 무한한 삶으로 인해 순간의 의미가 퇴색돼 버리는 운명을 겪게 된 것이다.

필멸자는 삶의 유한성 때문에 세상의 시간을 인식하며 살아야 한다. 한순간 피었다 지는 꽃처럼 살아있는 모든 순간에서 아름답고 사랑스러우며 놀라운 의미를 찾게 되는 것이다.

바야흐로 낙화의 계절이다. 그러니 꽃 지는 모습을 보거든 독자 여러분이여! “꽃이 지고 있으니 조용히 좀 해주세요”라고 김소연 시인이 당부한 것처럼, 잠시만 조용히 꽃 지는 소리에 귀 기울여 보시기를, 진실로 꽃은 피었다가 지므로 아름다운 것임을, 이것이 우리가 출 수 있는 유일한 춤임을 스스로에게 속삭여 보시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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