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이 있는 힐링여행[152]익산 미륵산둘레길
스토리텔링이 있는 힐링여행[152]익산 미륵산둘레길
  • 경남일보
  • 승인 2024.04.09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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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만 머무는 텅 빈 절터에서 채워지는 마음
◇선화공주와 서동의 사랑이 낳은 미륵사

“백제 사람인 서동은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인 선화공주가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 서라벌로 들어가 어린아이들에게 마를 나눠 주며 동요를 지어서 부르게 했다. ‘선화공주님은/남몰래 짝을 맞춰두고/서동 서방을/밤에 몰래 안고 간다’라는 내용의 서동요가 서라벌에 널리 퍼져 궁궐에까지 이르게 됐고, 노래의 내용이 사실이라고 믿은 관료들의 주장에 못 이겨 왕은 선화공주를 멀리 귀양을 보냈다. 황후가 귀양을 떠나는 공주에게 순금 한 말을 여비로 쓰라고 줬다. 유배지로 가는 도중에 서동이 나타나 공주를 모시고 백제로 갔다. 왕비가 된 선화공주가 어느 날, 무왕(서동)과 함께 사자사에 행차하던 중 용화산(미륵산) 아래 큰 연못가에 이르렀다. 이때 미륵삼존불이 연못 속에서 나타나자 왕과 왕비는 수레를 멈추고 경의를 표했다. 왕비가 왕에게 ‘이곳에 큰 절을 지어주십시오. 제 소원입니다.’라고 말하자, 무왕은 왕비의 요청에 따라 절을 짓기로 하고 사자사에 있는 지명법사에게 가서 연못을 메우는 일에 대해 묻자 법사는 신통력을 발휘하여 하룻밤 사이에 산을 무너뜨려 연못을 메워 평지로 만들었고 거기다 절을 세우니 그 절이 미륵사다.”(삼국유사 2권 기이편)

서동설화와 이를 뒷받침하는 삼국유사의 기록에 근거해 미륵사는 무왕과 선화공주가 세운 절이라고 여겨 왔다. 그런데 2009년 미륵사의 서쪽 탑을 복원하기 위해 해체하던 중, 석탑의 기둥석 안에서 탑을 제작할 때 봉안한 사리장엄구와 금제사리봉영기가 발견됐다. 193자가 적힌 사리봉영기엔 백제 황후 좌평 사택적덕의 딸이 재물을 희사해 미륵사를 지었다고 기록돼 있다.



◇텅 비어 있어 더 충만한 미륵사지

5만 평이나 되는 거대한 절인 미륵사는 지금 서탑과 당간지주, 금당터만 남아 있다. 백제의 화려한 불교문화, 선화공주와 서동의 사랑 이야기를 더듬기 위해 진주불교산악회 회원들과 함께 미륵산 둘레길 탐방을 떠났다.

진주에서 익산까지는 두 시간 남짓 걸렸다. 미륵산 둘레길 2코스의 출발점인 기양마을에서 아흔아홉 배미 논 쉼터-미륵사지(국립익산박물관, 연못, 석탑, 금당터)-구룡마을-구룡마을 당산나무와 대나무숲까지 8㎞를 탐방하기로 했다.

기양마을에서 소나무숲길을 따라 200m 정도 올라가자 세종대왕의 제1빈이자 화의군의 생모인 영빈의 묘역이 탐방객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소나무숲 갈림길이 나올 때마다 표지판을 잘 보고 걸어야 했다. 자칫 잘못하여 미륵산 정상으로 가거나 마을로 내려가는 길로 접어들면 원위치로 되돌아오거나 먼 길을 돌아서 미륵사지에 가야 한다.

기양마을에서 미륵사지로 가는 중간쯤에 아흔아홉 배미 논 쉼터가 나온다. 삿갓 하나로도 덮을 수 있는 크기의 논들이 많이 있었다고 ‘아흔아홉 배미 논’이라 이름을 붙인 것 같다. 일행과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며 잘 정리된 소나무 숲길을 따라 걷다 보니 금세 미륵사지에 닿았다. 5만 평이나 되는 절터를 보는 순간 모두가 탄성을 질렀다. 먼저 엄청난 크기에 놀라고, 다음엔 텅 비어 있는 평지의 절터를 보고 또 놀랐다. 절터 앞쪽의 연못 두 개, 당간지주 두 기, 석탑 두 기만 남아 있고 광활한 절터는 텅 비어 있었다.

그런데 잠깐만 마음을 비우고 절터를 바라보면 황량한 모습은 사라지고 새로운 세상 하나가 떠오른다. 자비로운 보살상을 띤 미륵산이 굽어보는 산의 끝자락, 높고 낮음이 없는 평지에 욕심마저 다 버린 채 뼈대만 남기고 선 석탑과 당간지주를 바라보고 있으면 텅 빈 채 고요만 머무는 마음자리에 미륵삼존불께서 들어와 가부좌를 틀고 앉은 듯 온 세상이 충만해지는 느낌이 든다.

한참 멍을 때리고 서 있는 필자의 볼을 찬 바람이 쓰다듬고 지나가자 금세 제정신이 들었다. 국보 11호로 지정된 서원 석탑은 한쪽이 떨어져 나가고 6층만 남았는데 일제강점기에 탑의 붕괴를 막기 위해 떨어져 나간 부분을 시멘트로 덧발라 놓은 적도 있었다고 한다. 1992년 복원된 동원 9층 석탑과 같은 모습을 지녔을 서원 석탑을 떠올리며 구룡마을로 향했다.



◇마음속에 미륵 한 분씩 모시고 사는 사람들

봄 햇살이 길섶에 내려앉은 포근한 소나무 숲길 끝에 구룡마을이 아담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마을 뒤쪽엔 수령 300년이 넘은 느티나무가 수호신처럼 마을을 지키고 서 있었다. 느티나무가 선 언덕에 오르자 건너편 울창한 구룡마을 대나무숲이 한눈에 들어왔다. 시골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논두렁길을 걸어서 구룡마을 대나무숲에 닿았다.

구룡마을 대나무숲은 면적이 5만㎡나 되는 국내 최대 대나무 군락지다. 왕대들이 주류를 이루는 대나무숲은 드라마 ‘추노’와 영화 ‘활’의 촬영지로도 널리 알려진 곳이라 탐방객들이 꽤 많이 찾아온다고 한다. 대나무숲 속에 조성해 놓은 우물터와 만남의 광장 등이 대숲의 운치를 더해 주었다.

대숲 옆에는 큰 바위 하나가 다른 바위 하나를 업고 있는 모양의 ‘뜬 바위’가 있었다. 윗돌과 밑돌 사이에 틈이 나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평소에는 서로 닿아 있다가 섣달그믐 자정이 되면 윗돌과 밑돌 사이가 떠서 양쪽에서 명주실을 쥐고 두 바위 사이에 넣고 잡아당기면 실이 걸리지 않고 통과한다고 한다.

구룡마을 사람들은 당산나무인 느티나무와 함께 ‘뜬 바위’를 신성시하고 있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구룡마을 뒤의 느티나무와 미륵산, 그리고 뜬 바위를 미륵으로 여기며 살아가고 있었다. 우리는 모두 마음속에 미륵 한 분씩 모시고 살아간다. 그 마음이 우리를 힐링과 행복의 세계로 이끌어 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박종현 시인, 멀구슬문학회 대표
국보 11호인 미륵사지 석탑(서탑).
대나무숲 옆의 뜬바위.
동원 금당터의 석재.
미륵사지 건물의 석재를 한곳에 모아놓은 모습.
미륵사지 내 연못.
미륵사지 동탑.
미륵사지에서 바라본 미륵산.
구룡마을 대나무숲 우물터.
구룡마을로 가는 논두렁길.
아흔아홉배미 쉼터 표지판.
미륵산 둘레길 소나무숲길.
구룡마을 당산나무.
구룡마을 대나무숲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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