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일춘추]단발령
[경일춘추]단발령
  • 경남일보
  • 승인 2024.04.11 14:4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유진 수필가
 


친구는 주말에 며느리가 온다고 시장도 봐야 하고 집안 청소를 해야 한다고 연신 ‘바쁘다’며 나를 맞았다. 세상이 아이러니하게도 시어머니가 며느리 시집살이를 하는 세상으로 변했다. 반세기도 지나지 않은 내 새댁시절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떠올랐다. 직장을 다니다 늦은 나이인 서른두 살에 결혼을 했다. 나이가 많아 시어머니한테 처음부터 눈 밖에 났다. 내가 아무리 잘해도 미움의 색안경을 벗지 않았다.

첫 번째로 받은 시집살이가 단발령이다. 신혼여행 다녀온 새 며느리에게 긴 머리 자르고 동네 아주머니들처럼 퍼머를 하라는 시퍼런 시어머니 명령이 떨어졌다. 대학원을 다니는 시동생이 명령을 전달하기 위해 내 신혼집으로 가져왔다. 시댁에는 혼기 꽉 찬 시누이도 있었다. 누구도 단발령을 말리는 사람이 없는 상황 속에서 시어머니의 명령은 나에게 전달됐다. 머리도 마음대로 못하는 나는 시댁의 이방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신혼여행을 막 다녀온 새댁의 힘은 무기력할 수밖에 없었다. 시집살이가 맵다는 걸 단박에 눈치챘다. 을미사변 직후 내려진 단발령이 지금 내 앞에 있었다. 나는 처음엔 져주면서 나중에 이기는 길을 선택했다. 미장원에서 긴 머리를 자를 때 친정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긴 머리든 커트머리든 늘 예쁘다고 칭찬해 주신 어머니가 사무치게 그리웠다.

남편을 선택해 결혼한 내 입장에서 시댁 가족 그들의 부속품으로 취급되는 순간순간이 정말 견디기 힘들었다. 예절을 중시해 온 안동이 내 고향이다. 나는 어릴 적부터 유교 교육을 받고 자랐다. 한번 결혼하면 다시는 친정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출가외인은 반드시 시댁 선산에 묻혀야 한다는 훈육을 받고 자란 나는 모든 것을 감내하면서 살았다.

만약 요즘 젊은 새댁들이라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우선 여성의 인권이 짓밟혔다며 분노할 것이다. 남녀 평등시대에 시어머니의 시대착오적 사고방식에 강력히 저항할 것이다. 또한 여성이 여성을 핍박하는 시어머니께 훈시를 할 것이다. 일제 강점기 조선인을 가장 많이 괴롭힌 존재는 일본 앞잡이인 조선인이었던 것처럼, 여성의 인권을 옹호하는데 앞장서야 할 여성이 되레 여성을 구박하는 현실에 대해 분노할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로 이슈화 해 이혼서류에 붉은 도장 꾹 찍어 시부모 턱밑에 밀어 넣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돌아설 것이다.

35년 전 내가 겪었던 모진 시집살이 이젠 찾아보기 힘들다. 며느리를 애지중지 여기며 살아가는 시대다. 며느리와 자식, 손주를 위해 시장을 보고 집 청소를 하고 용돈 준비를 하는 일은 세대 간의 소통이요, 새로운 사랑법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경상남도 진주시 남강로 1065 경남일보사
  • 대표전화 : 055-751-1000
  • 팩스 : 055-757-1722
  • 법인명 : (주)경남일보
  • 제호 :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 등록번호 : 경남 가 00004
  • 등록일 : 1989-11-17
  • 발행일 : 1989-11-17
  • 발행인 : 고영진
  • 편집인 : 강동현
  • 고충처리인 : 최창민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지원
  • 인터넷신문등록번호 : 경남, 아02576
  • 등록일자 : 2022년 12월13일
  • 발행·편집 : 고영진
  •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gnnews@gnnews.co.kr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