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일춘추]오늘의 놀이
[경일춘추]오늘의 놀이
  • 경남일보
  • 승인 2024.04.30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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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승영 시인
유승영 시인


잎을 틔우지 않아서 자꾸만 쳐다보았던 나무다. 그런 마음을 알기라도 한듯 순식간에 나무는 보란 듯이 잎을 틔워주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분명히 마른가지였는데 동시다발로 보기 좋은 커다란 나무가 됐다. 한동안 이 나무를 나는 바라볼 것이다. 그리고 겨울이 오기까지 나무는 살아서 잎들을 성장시킬 것이다. 연초록이 앞 다투어 활짝 피어난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참 많은가보다. 색다를 것 없이 시작되는 우리들의 아침처럼, 유리창으로부터 시작되는 우리들의 아침처럼 말이다.

지리산 자락에 집을 짓고 살던 때가 있었다. 지리산 한 자락을 허락해 준 나무들이 고맙다. 대도시를 떠나 어중간한 작은 도시에 적응하기까지 쉽지 않았듯이, 나무 한 그루가 뿌리를 내리고 자신의 영역을 만들기까지는 수많은 시간을 흘려보냈을 것이다. 갓 심은 나무들이 숲을 이루기까지 또한 머나먼 여행길이다. 세계와 세계가 맞닿기 위해서 애쓰는 일이다. 이왕이면 더 깊은 산골을 자처해서 지리산을 선택했다. 지리산에서 몇 번의 겨울과 가을을 나고 봄꽃들을 만날 때마다 그 신비감은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경이로움이었다. 봄은 비로소 내가 완성되는 계절, 다시 말해서 우리가 살아있음을 실감하는 찰나다. 하루아침에 뚝딱 잎을 틔워낸 것은, 우리들에게 순식간이었지만 나무둥치에서는 저 먼 가지 끝까지 수분을 퍼 올리느라 수 없이 반복되는 수고가 있었을 것이다. 각기의 영양소들이 쉼 없이 자신의 역할을 감당했기에 잎을 틔우고 마침내 나무 한 그루가 완성됐다는 사실이다. 단지 비바람을 이겨낸 자부심이 아닌 세계와 세계가 만나는 몸부림이었으며 생각지 못한 만남이며 성장이고, 나를 꿈꾸게 하는 인고의 시간이다.

한 편의 글이 쓰이기까지 앓는 몸살처럼 지리산은 그렇게 나를 품어줬다. 날마다 다른 구름과 풀잎과 풀잎 사이로 지나가는 바람의 평온함 속에서 쓰고 읽기를 반복했다. 낯설었지만 낯설어서 어쩌면 탄탄하게 지탱할 수 있었을지 모르겠다. 끊임없이 쓰게 했고 읽게 했으니 지리산은 성공했다. 그곳에서의 여백은 강렬했으며 부드러웠고, 그 하나를 쓰기 위해 끝까지 밀어붙이며 선 하나의 떨림과 선 하나의 흐트러짐을 반복하면서 비로소 완성 되었던 지점이었다. 파운드(E. Poun)는 이미지와 리듬이 함께 구성돼야 시(詩)가 된다고 했다. 감각이 살아서 강하게 호소되는 것, 논리적이고 고차원적인 긴밀한 이탈이 아닌, 서로의 세계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일이다. 시(詩)붙이들과 봄 학기를 시작했다. 어제 잎을 틔운 나무 밑에서 잎새들의 속살을 받아 적으며 우리는 놀아 볼 참이다. 마음 놓고 허비해도 좋을 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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