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찬 창원총국 취재팀
약간의 집안 내력에 안일함과 게으름을 더하면 곧바로 ‘덴탈 클리닉’이라는 등식이 성립된다. 여지없다. 치과 베드에 누워 의사를 기다리는 동안 정면 진료기록 모니터를 멍하니 보고 있자니 진료란에 적힌 단어가 눈에 띈다. 비가역적 치수염. ‘근사한 단어일세’. 검색해보니 ‘치아(치수)의 손상이 광범위해 치유가 불가능하니 신경치료하거나 아예 뽑아야 한다’는 뜻이네. 와중에 의사가 와서 농삼아 “비가역이란 단어가 근사하네요” 했더니 “그 근사함 뒤에 통증이 숨어있습니다”란다. 의사의 냉정함, 여지없다. 그 뒤로 꼬박 1시간을 살벌하게 뭉근한 통증에 시달렸다.
비가역적.(非可逆的, 좋은 낱말이지 않은가) 주위 환경 변화에 따라 이리저리 쉽게 변하지 않는. 돌이킬 수 없는. irretrievable, 이뤼츄뤼버벌. 꽤나 까탈스런 발음이지만 그만큼 중후하고 근엄한 동시에 단호하다. 거기다 고통까지 거느린다.
여기 또다른 결을 가진 비가역의 고통이 있다. 대통령 선거를 치러온 가친(家親)의 은밀한 고통이다. 당신의 대통령 투표 성공률은 꽤 높다. 하긴 40년대 태어나 경상도에서 줄곧 살아온 촌로라며 ‘타율’이 나쁠 수 없다. 그런데 이 높은 타율이 게임의 승리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이 문제다. 여느 집처럼 가족이 다 모인 술자리에 정치 얘기는 단골안주다. 얼큰히 술이 오르면 여지없는 나랏님 뒷담화. “잘할 거라고 믿었는데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 거참.” 옆에서 동생이 핀잔. “아빠는 맨날 레퍼토리가 똑같누. 찍을 때는 그리도 좋아하더니 시간 좀 지나면 꼭 저러셔.” 살짝 떨어진 고개 아래로 한숨 섞인 아버지의 작은 목소리. “그러게 말이다.” 가친의 한숨에 고통이 배 있다. 여실하다.
선거는 다시 온다. 2027년이면 아버지는 또 대통령을 뽑아야 한다. 이번에야 말로 당신 정치성향의 비가역성이 품고 있는 고통의 굴레에서 자유로울 수 있기를 진심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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