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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저편 <16>
이해선  |  gnnews@g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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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2.03.29  15:2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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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한동네에서 살아온 정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딸년을 위해 여주댁과 진석이가 빨리 주재소로 끌려가길 바라고 있었다. 순사를 그 지경으로 만들어놓았으니 쉽게 빠져나오지 못할 것이라고 주문을 외기도 했다.

 “그러지 말고 뒷간에 다녀오세요.”

 창호지 문에다 내놓은 손가락구멍으로 어머니의 눈치를 살피고 있던 민숙은 방문을 살그머니 열며 얼굴을 쏙 내밀었다. 그녀는 날이 밝아올까 봐 가슴이 졸아붙고 있었다. 죽은 순사를 찾아 금방이라도 눈에 불을 켠 인간들이 나타나 오빠의 집을 들쑤셔댈 것만 같았다. 그렇게 되면 오빠가 학도병으로 끌려가는 건 시간문제였다.

 “흥, 내가 네년 속을 모를 줄 알고…….”  

 화성댁은 딸의 머리를 쿡 쥐어박고는 방안으로 사정없이 밀어 던졌다. 그리고는 사정이 더욱 급해졌는지 궁둥이를 뒤로 쑥 뺐다간 다리를 옹색하게 모으며 오만상을 찡그렸다. 욕설이 잔뜩 실린 입언저리를 사정없이 씰룩거리기도 했다.

 “아버님께서 저희 목숨을 살려주셨단 말이에요.”

 민숙은 목매인 소리로 투덜거렸다. 진석의 아버지가 너무 그리운 것이었다. 둘 다 빨리 달아나라고 하던 그 말만 생각하면 며느리 대접을 받은 것만 같아 가슴이 벅차올랐다.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정의 저력 같은 것도 맛보았다. 시시콜콜 잔소리하고 걱정하는 어머니의 애틋함보다는 확실히 그 무게가 달랐다.

 그렇더라도 ‘아버님 타령’은 어디까지나 핑계였다. 진석이가 받았을 충격 때문에 민숙의 가슴은 자글자글 졸아붙고 있었다. 그를 위해 위로해줄 말이 준비되어 있는 건 아니었다. 그냥 옆에 있어 주고 싶었다.

 “이년아, 아버님은 무슨!”

 화성댁은 살갗에 닿은 송충이를 떨어버리듯 펄쩍 뛰며 소리를 팩 질렀다.

 ‘썩을 년, 겁도 없는 년, 신세 망치려고 작정한 년, 더러운 문둥병자를 아버님이라니!’

 당장이라도 딸년의 머리끄덩이를 쥐어뜯어주고 싶었다. 정신이 번쩍 들도록 몽둥이찜질이라도 해주고 싶었다. 화성댁은 입술을 부르르 떨며 또 애꿎은 하늘을 흘겼다.

 “정말 너무하세요.”

 민숙은 일부러 방바닥에 털썩 소리를 내며 주저앉았다. 

 ‘오빤 어떻게 하고 있을까?’

 먼동이 밝아오는 것만 같아 민숙은 한시가 급했다.

 “다 네년 잘되라고 하는 짓이다.”

 뒤가 너무 급해진 화성댁은 손으로 뒤를 딱 막았다.

 “알았어요. 두 눈 질끈 감고 오빠 잊을게요.”

 민숙은 목을 뒤로 쭉 빼선 사뭇 침착해진 목소리로 벽에다 대고 말했다. 이어 숨도 쉬지 않고 목을 돌려 또 손가락구멍에다 눈을 딱 갖다 댔다.

 “이년아, 믿어도 되겠냐?”

 화성댁은 궁둥이를 바짝 조였다. 눈은 자꾸만 측간으로 당겨졌다. 그곳을 가린 거적때기가 눈이 빤히 보였다. 마음으론 한없이 멀게 느껴졌다.

 “하나뿐인 자식을 믿지 못하시겠다면 옷에다 볼일을 보시던지.”

 민숙은 엉덩이를 뒤로 쭉 밀며 몸을 완전히 뒤로 돌렸다.

 비로소 딸이 방문에서 떨어졌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화성댁은 측간으로 숨도 쉬지 않고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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