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년 민숙앗!”
화성댁이 입에 거품을 물고 나타났다. 다짜고짜 딸의 머리채를 낚아채곤 마을로 끌어가기 시작했다. 오다가 몇 번이나 넘어졌는지 누런 광목 치마에는 시뻘건 흙이 군데군데 찍혀 있었다.
“엄마, 이것 놓고 말씀하세요.”
민숙은 목소릴 낮추어 침착하게 말했다.
“이 철딱서니 없는 년아, 문둥병이 얼마나 무서운 지 알기는 알고 덤비니?”
화성댁은 이를 뽀드득 갈았다.
“알았어요. 제 발로 갈게요. 이거 놔 주세요.”
민숙은 앞장서서 끌려가 주었다. 어머니의 드센 행동이 오빠의 아픈 가슴을 더욱 깊이 후벼 파 놓을 수 있어서 마음저리는 것이었다.
그악스런 장면을 지켜보며 여주댁은 입을 꾹 봉하고 있었다. 드러내놓을 수 없는 가슴만 갈가리 찢기고 있었다. 화성댁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아들의 가슴에 대못이 되어 쿡쿡 박히고 있을 것이어서.
‘한 많은 이 세상, 훌훌 털고 좋은 곳으로 가시오. 숨어살지 않아도 될 곳으로 마음껏 날아가시오. 당신을 위해 슬퍼하지 않을 테니 웃으며 가시오.’
여주댁은 눈물을 왈칵왈칵 쏟으면서 울지 않겠다고 주문을 외어댔다.
진석은 아침노을이 동산 머리맡을 붉히기 전에 학동마을을 떠났다.
‘독사보다 더 독해져야 한다.’
여주댁은 딱 한번 뒤돌아보는 아들을 향하여 빨리 가라고 손사래를 치며 아픔을 악물고 있었다.
순사 다께가 새로 학동마을에 나타나곤 했다. 놈의 눈은 어쩌다 슬쩍 마주쳐도 온몸에 소름이 쫙 돋을 정도로 눈알이 노랬다. 그런 눈을 사납게 굴려대며 기분 내키는 대로 사람들을 끌고 갔다.
학동 사람들은 무조건 모른다고 딱 잡아뗐다.
어디까지나 왜놈순사 앞에서는 겁도 없이 그랬다.
사실 학동마을에선 시도 때도 없이 앞집과 뒷집 그리고 옆집과 옆집의 담 위로 여자들의 머리가 쏙쏙 올라오곤 했다. 그녀들은 얼굴을 바짝 맞대고는 여주댁을 씹고 또 씹으며 치를 떨었다.
문둥병 환자가 아이를 잡아먹는다는 속설이 있었다.
까닭으로 아이가 있는 집에선 비상사이렌까지 울려놓았다. 남의 어린것들에게까지 단단히 주의를 주곤 했다. 산에 붙어 있는 그 집 근처엔 절대로 가지 말라고.
사실 학동사람들은 여주댁을 마을에서 쫓아내고 싶은 마음들은 굴뚝같았지만 서로의 눈치를 보며 먼저 말을 끄집어내진 못하고 있었다.
사정이 그렇더라도 여우같은 왜놈순사한테만은 여주댁과 진석을 내어줄 수 없는 노릇이었다. ‘같은 토종끼리’라고 하는 핏줄의식이 묵묵히 사람들 마음을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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