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저편 <38>
오늘의 저편 <38>
  • 이해선
  • 승인 2012.03.29 15: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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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숙은 서둘러 호롱을 등잔대에 올렸다. 다행히 석유가 방바닥에만 번져 있을 뿐 홑이불이나 옷가지에는 튀지 않은 것 같았다.

 “……일어났니?”

 이른 아침 여주댁은 안방에서 나오며 창호지문에 비친 민숙의 그림자를 보고 조용히 말을 걸었다. 오늘 아침에는 ‘새악아’ 라고 하는 소리가 잘 나오지 않아서 쏙 빼고 말했다.

 “예 어머니.”

 민숙은 아무 일도 없었던 얼굴로 방문을 열었다.

 ‘여우같은 것!’

 그러나 여주댁은 마음을 잘도 꼭꼭 숨기곤, 

 “너 잠버릇이 아주 고약한 모양이구나.”

민숙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코로 큼큼 냄새를 맡았다.

 “아, 예, 어머니. 몸부림을 치다 그만…….”

 등잔으로 돌렸던 목을 방바닥으로 떨어뜨리며 민숙은 말을 더듬었다. 화끈거리는 얼굴을 두 손으로 얼른 감쌌다.

 “방문을 활짝 열어 둬라. 석유 내는 독해서 방문을 닫아두면 좀처럼 날아가지 않는다.”

 불편한 마음을 숨기며 여주댁은 장독대로 가기 위해 댓돌로 내려섰다.

 “예, 문 활짝 열어 놓겠습니다.”

 민숙은 얼른 여주댁 뒤를 따라갔다. 날마다 이 시각이면 제일 큰 장독대 위에 정안수를 떠놓고 진석이가 무사하길 둘이 같이 빌고는 했다.

 “오늘은 나 혼자 하마.” 

 무심결에 여주댁은 볼멘소리를 뱉어버렸다.

 “옛?”

 민숙은 흠칫 놀랐다.

 ‘아뿔싸!’

 속을 숨기지 못하고 퉁퉁거리고 만 여주댁은 서둘러,

 “네가 피곤해 보여서 그런다. 좀 더 자려무나.”

부드럽게 가공한 목소리로 둘러댔다.

 “아, 아뇨 괜찮습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민숙은 여주댁 뒤를 선뜻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어제와는 좀 다른 뜻 모를 거리감 같은 것이 느껴지고 있어서였다. 

 ‘설마 형식이와 난리친 걸 다 알고 계신 건 아닐까?’

 제바람에 발이 저린 민숙은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학동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충동적으로 일어났다. 

 아침을 맞은 학동의 달은 무슨 고민이 그렇게 많았던지 하룻밤 사이에 허옇게 늙어버렸다. 검정색을 쓰고 끊임없이 새살거리던 마을 앞 개울물은 밝아오는 먼동에 투명한색을 되찾고 있었다. 

 집집마다 허연 연기가 하늘로 머리를 풀어헤치기 바빴다. 햇살이 퍼지기 전에 논밭으로 나가기 위해선 이른 아침을 먹어야 하는 것이었다.

 화성댁은 버릇처럼 사립문 밖으로 목을 길게 뺐다. 눈으론 마을 어귀를 더듬고 있었다. 짙푸른 옷을 겹겹이 껴입은 정자나무는 미처 어둠을 다 밀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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