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엌문 옆의 오지독에 꿈에도 구경하기 힘든 허연 떡쌀이 불리어져 있은 것을 보면서 화성댁은 또 속이 뒤집어졌다.
“어서 오우.”
화성댁을 발견한 형식 할머니가 사립문밖으로 나오며 반색했다.
“예. 이제 손자며느리를 보았으니 얼마나 좋으세요?”
남의 경사에 초를 치듯 우거지상을 하고 있을 수 없어서 화성댁은 나오지도 않는 웃음을 억지로 만들어서 입가에 펴 발랐다.
“이 늙은이 이젠 눈을 감을 수 있겠어.”
할머니는 굽은 허리를 조금 들며 말 그대로 소녀처럼 활짝 웃었다.
‘민숙이가 내 새끼하고 맺어졌으면 좋아서 춤을 추었을 것이다. 시방 자네 속도 속이 아닐 것이네.’
사람이 나이가 많아지면 보려고 애쓰지 않아도 남의 속이 너무 잘 들여다보이는지 노파의 눈에 화성댁의 속마음이 빤히 보였다.
“무슨 그런 말씀을 하세요. 앞으로 알토란같은 증손도 보시고 손자며느리 효도도 받으면서 오래오래 사셔야죠.”
화성댁은 씻어서 엎어둔 대소쿠리를 집어 들고 떡쌀 쪽으로 갔다.
오늘따라 쓸쓸해 보이는 화성댁의 뒷모습을 보며 할머니는 혀를 찼다.
‘이녁도 좋은 사윗감 찾아 옛말하며 살날이 있을 것이요.’
물을 빼기 위해 불려놓은 쌀을 소쿠리에 붓는 화성댁을 보며 할머니는 또 중얼거렸다.
다른 여자는 거들떠보지도 않는 손자를 위해 할머니는 민숙을 직접 찾아간 적이 있었다. 어디까지나 동생으로밖에 여겨지지 않는 형식과 어떻게 결혼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하는 민숙의 말에 어지간히도 마음이 상했다.
동생으로 생각해도 좋으니까 부모 없이 자란 불쌍한 내 손자 몽당귀신 되는 것만 막아달라고 통사정도 해 보았다.
화성댁도 나서서 어쨌든 딸의 마음을 움직여보려고 했지만 진석 오빠 타령을 노골적으로 해대는 바람에 상대 앞에서 여간 민망하지 않았다.
결국 할머니는 괘씸한 마음을 꼭꼭 씹으며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때는 정말 민숙이 그 아일 평생 바로보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더 솔직히 말하면 뽀얀 그 아이의 얼굴을 마구 할퀴어 주고 싶었다.
마음에 속 드는 손자며느리를 보게 되면서부터 할머니는 세상을 다 끌어안을 듯 마음이 넉넉해졌다. 문둥병자의 아들한테 빠져 있는 민숙이 걱정도 하게 되고 화성댁 처지가 안타깝게 여겨지기도 하고 그랬다.
할머니는 이제 소원이 없었다. 있다면 손자부부가 아무 탈 없이 아들딸 많이 낳고 오래오래 잘 살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좋으세요? 왜 아니 그러시겠어요?’
이젠 마당가의 아궁이로 불을 지피러 가던 화성댁은 연신 웃음꽃을 피우고 있는 할머니를 향하여 소리 없는 미소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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