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었던 대지 풀려 봄바람 나겠네~
얼었던 대지 풀려 봄바람 나겠네~
  • 경남일보
  • 승인 2012.04.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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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이명산~봉명산

 

계절이 바뀌니 바람에 실려 오는 냄새부터 달라졌다. 겨우내 얼었던 대지가 풀리면서 땅속에 갇혀 있던 흙냄새가 제일 먼저 날아든다. 땅 냄새에 놀라 겨울잠에 들었던 식물이 깨어나고 다투어 내놓는 풍성한 대자연의 향기가 서서히 묻어오기 시작한다. 찬바람 속에 코끝을 자극하는 은은한 매향은 봄소식을 알리는 전령이다. 꽃이 발산하는 향기도 계절에 따라 어울리는 짝이 있어 초봄에는 맑고 은은한 향이 제격이다. 같은 시기에 노란꽃이 피는 생강나무의 알싸한 향도 춘심을 자극한다. 하나 둘 더해가는 봄의 정취에 흐뭇해 할쯤이면 만물이 쏟아내는 풋풋한 향과 함께 대지도 푸르게 변하며 봄이 무르익는다.

 야생초 산행은 하동군 북천면과 횡천면의 경계에 위치한 황토재에서 시작했다. 주변에 붉은 황토가 많아 붙여진 황토재라는 고개는 흔한 이름 같지만 정겨운 고향냄새가 물씬 묻어난다. 오늘따라 봄을 시샘하는 찬바람이 세차게 부는 황토재는 한때 하동에서 진주, 완사와 북천으로 넘나들던 유일한 길로 장날이면 많은 사람들이 넘나들었다고 한다. 휴게소가 있는 고갯길도 터널로 이어질 새 길이 완공되면 사람들로부터 서서히 잊어져 갈 것이다.

 산행은 이명산 6km라고 적혀진 안내판을 따라 매실농장 사이로 난 임도를 오르면 된다. 여기 매실농장은 북향에 고지대라 꽃피는 시기가 늦다. 3월 하순쯤 되어야 꽃이 필 것 같다. 농장을 지나고 나면 평탄한 능선으로 이어지는 소나무 숲이 시루봉까지 계속된다.

 북천면과 양보면의 경계가 되는 산마루 등산로에는 두 지역을 이어주던 길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으나 넘나드는 사람이 없어 잡목으로 우거져버린 옛길은 헤아리기 어렵게 변했다. 생활의 방편이었고 소통의 통로였던 옛길은 사라지고 여가를 보내기 위해 산을 찾는 사람들이 이용하는 등산로만 남았다. 소나무가 도열한 능선을 타고 넘는 이명산은 조용히 자연과 교감하며 걸어도 좋고 여럿이 담소하며 지나도 부족함이 없는 아늑한 등산로다.

 등산로 주변에 흔한 늘 푸른 노루발풀은 묵은 잎 가운데 붉은 새잎이 돋기 시작했다. 그러나 꽃은 5월이 되어야 볼 수 있다. 소나무 아래서도 잘 자라는 보춘화(춘란)는 꽃이 필 시기가 되었는데도 늦추위에 꽃대 자람이 더디다. 열흘은 더 지나야 완전히 꽃대를 내밀 것 같다. 등산로를 사이에 두고 방향에 따라 차이도 커 북사면은 더 늦어 꽃대의 움직임에 미동도 없다.  

 시루봉까지는 바위 한 번 밟지 않아도 오를 수 있는 부드러운 등산로다. 시루봉은 높이가 548m로 정상에는 달구봉(鷄峰)이라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표지석에는 동국여지승람에 나타난 이명산의 유래가 적혀 있는데 이를 옮겨 적었다.

 나무 한 그루 자라지 않는 시루봉은 사방으로 막힌 곳이 없어 조망이 빼어나다. 북쪽으로 길게 막아선 지리산 주능선은 물론이고 남해바다 위로 점점이 떠 있는 크고 작은 섬과 오밀조밀한 해안선을 한눈에 살필 수 있다. 또한 남해바다로부터 전해오는 봄기운을 먼저 느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꽃샘추위 속에서도 따스한 봄볕을 받아 산 아래로부터 빠르게 등고선을 따라 푸른빛을 더해가는 모습에 계절이 바뀜을 알아차린다. 내려다보이는 들판으로 부쩍 푸르게 변한 보리밭과 농사일로 요란한 경운기 소리만으로도 봄을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다. 

 이명산 정상은 상사봉(570m)이다. 시루봉에서 상사봉으로 가기 위해서는 경사가 다소 급한 산마루를 두어 번 오르내린다. 중간에 정상을 올랐다가 되돌아 내려가야 할 마애불 갈림길을 지나야 한다. 상사봉에는 정자가 있어 편하게 조망하며 쉴 수 있다. 보는 방향에 따라 왕관을 닮았다는 동쪽의 봉명산이 이곳에서는 밋밋한 능선으로만 이어져 다른 산처럼 보인다.

 상사봉에서 길을 잠시 되돌아 내려가 마애불로 향했다. 마애불은 천연 암반을 이용하여 벽면에 새긴 불상이다. 처음 조성했을 당시에는 돌을 쌓아 무덤처럼 만든 석굴사원이었다고 전한다. 지금은 세월에 풍화된 마애불과 무너진 돌조각만 뒹굴고 있다.

 마애불 주변에는 시루떡을 차곡차곡 포갠 모양을 한 바위들이 여기저기 서 있다. 세월을 켜켜이 이고 선 모습이 특이하고 경이롭다. 어떤 바위는 짐을 가득 싣고 출항을 앞둔 배를 닮았다. 

 마애불 앞으로 난 길로 방향을 잡으면 쉼터가 있는 약수터로 간다. 약수터에서는 이병주 문학관을 경유하여 가을 코스모스·메밀꽃 축제로 유명한 북천으로 가는 길도 있다. 야생초 산행은 시원한 약수로 목을 축이고 포장도로를 따라 무고재로 올랐다. 무고재는 북천면과 곤양면을 이어주는 고개다.

 무고재에서도 임도를 따르면 산허리를 돌 수도 있고 산능선을 타고 봉암산을 올랐다가 보안암으로 가는 방법도 있다. 야생초 산행은 힘들지만 능선을 따랐다. 오후 햇볕이 따듯한 능선에는 둥근털제비꽃이 봄볕을 즐기고 있다. 제비꽃 중에서 가장 먼저 피는 꽃 중에 하나다. 꽃은 보라색으로 잎과 함께 뿌리에서 바로 나온다. 한번 눈에 띈 둥근털제비꽃이 더 자주 보이는 것은 자생지를 알고 난 후 비슷한 환경에 눈이 자주 가기 때문이다. 헤어졌던 길은 보안암 텃밭이 있는 비닐하우스에서 다시 만난다.

 보안암에는 고려 말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석굴이 있다. 석가모니불을 모신 석굴은 주변에 있는 널빤지 모양의 돌을 쌓아 만들었다. 보안암 석축과 담장을 쌓은 돌도 주변에 흔한 널빤지 모양의 점판암이다. 세월의 흔적을 대변하듯 이끼 낀 석축에는 꼬리고사리와 일명 ‘거미일엽초’라 불리는 거미고사리가 추위에 아랑곳하지 않고 푸르다. 석축은 쌓은 연대도 오래되었겠지만 동북향에다 주변에 서어나무와 같은 낙엽교목이 울창하여 이끼가 자라기 좋은 환경을 만들고 있다.

 보안암을 뒤로하고 다솔사로 향했다. 다솔사로 가는 길도 봉명산을 올랐다 가는 길과 산허리를 돌아가는 길이 있다. 봉명산 정상에는 소나무 사이에 세운 높은 정자가 있다. 소나무가 울창한 숲에는 이제 막 피기 시작한 생강나무의 노란꽃이 향기를 내뿜는다. 코끝을 자극하는 향이 독특하여 한참을 머물며 호흡해 본다. 곧장 내려서면 다솔사다. 신라시대 연기조사가 창건했다는 천년 고찰 다솔사는 김동리가 소설 등신불을 집필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또한 만해 한용운 선생이 머물며 독립선언서 초안을 작성한 곳이기도 하다. 다솔사이라는 절의 이름은 대장과도 같은 주산이 군사를 많이 거느리고 있다는 의미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다솔사의 주산 봉명산(鳳鳴山)은 군왕을 상징하는 봉황이 노래하는 산으로 다솔사 입구에는 왕명으로 묘자리를 쓰지 못하게 한 봉표가 있다. 경내 곳곳에 자라는 차나무는 이곳이 차 문화의 산실임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부처님 진신사리가 봉안된 적멸보궁과 경남도 문화재로 지정된 대양루를 돌아보고 경내를 빠져나와 숲길을 걸어 봉표를 만나면 산행도 끝난다. 황토재를 출발하여 11km의 거리를 5시간 걸었다.

/NH농협 진주시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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