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저편 <76>
오늘의 저편 <76>
  • 강민중
  • 승인 2012.04.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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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은땀을 흘리며 잠을 깬 정자는 밖으로 나가려다 말고 귀만 문에다 꽂아두고 있었다.

‘많이 아픈가 봐. 어떡하면 좋아?’

얼굴도 모르는 민숙을 동정하고 있었다.

“진석이 학생한테 연통은 넣은 거요?”

달아나려는 화성댁의 꽁무니를 붙잡듯 말을 급히 던진 노파는 손자며느리의 방을 흘깃 곁눈질했다.

“아참, 내 정신 좀 봐. 어르신께 죄송하단 말씀부터 드려야 했는데…….”

상대의 마음을 바로 알아차린 화성댁도 새색시의 귀를 의식하며 정자의 방을 곁눈질했다. 그리곤 자식이라고 딸년 하나 달랑 있는 거 마지막으로 진석의 얼굴은 보고 죽게 해야 하는데 당장 연락을 넣어줄 사람은 새신랑밖에 없어서 경성으로 보냈다는 말도 덧붙였다.

“이제 민숙일 시집보내면 우리 새신랑 부려먹을 일 없겠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화성댁이 사정사정하니까 거절도 못하고 달려간 게야.”

노파는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정말 죄송합니다. 이날 이때까지 사람의 도리는 지키면서 살아왔는데 딸년 목숨이 오늘내일 하니까 눈에 보이는 것이 없어서 그만 어르신께 큰 걱정을 끼치고 말았습니다.”

화성댁은 구차하게 변명을 늘어놓았다.

“인동 달인 물 있는데 가겨가요.”

노파는 짐짓 퉁명스럽게 말했다.

“뭘 통 삼키질 못하고 있어서 집에 달여 놓은 것도 그대로 있습니다.

화성댁은 종종걸음으로 달아났다.

슬그머니 문을 열고 나오던 정자는 무심결에,

“그냥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라고 중얼거리다간 그런 그녀 자신에게 소스라치게 놀랐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민숙에 대한 안타까움이 꿈틀거렸는데 앉은자리에서 그녀가 몹시 미워지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새아가, 저녁은 우리 세 식구 같이 먹을 수 있을 것이다.”

손자며느리의 얼굴을 보며 노파는 굳이 저녁타령을 앞당겨서 했다.

집으로 향하던 화성댁은 마을길로 이어지는 마을 밖의 길까지 눈으로 훑고 있었다. 눈이 빠지도록 기다리는 두 남자가 아직은 나타날 때가 되지 않았는데도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민숙은 느닷없이 나타난 아버지라는 사람을 따라 길을 떠나고 있었다. 너무 일찍 여윈 아버지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지 않았지만 상대가,

“내가 네 아비다.”

라고 하니까 그냥 그렇게 의지력이 상실된 사람처럼 무작정 뒤따라가는 것이었다.

‘도대체 어디까지 가야 하는 것일까?’

가뭄이 얼마나 오랫동안 계속되었으면 길가엔 그 흔한 풀 한 포기조차 보이지 않고 있었다. 흙을 포근히 잠재워줄 풀잎이 없어서인지 바람이 불어올 때이면 거친 땅에서 일어난 흙먼지가 허공으로 몸을 풀어헤치며 시야를 가리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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