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저편 <93>
오늘의 저편 <93>
  • 경남일보
  • 승인 2012.05.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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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지깽이 없는 집구석도 다 있더냐? 혹시 부뚜막 위에도 찾아보았는가?”

말은 진석에게 하면서 화성댁은 민숙을 사정없이 흘겨댔다.

“다 타서 버렸나 봐요. 다른 집으로 가 봐요.”

대꾸 대신 목을 옆으로 돌려놓고 있는 진석을 대신하여 민숙이가 끼어들었다.

화성댁도 서둘러 옆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머리에 먹물이 가득 든 놈이 처음부터 이런 일에 뜻을 모아준 것만으로도 얼마나 고마운 일이던가. 그 마음이 변하기 전에 목적을 이루어야 했던 것이다.

다른 집 부엌에 들어갔던 진석은 이번에도 빈손으로 나왔다. 더는 남의 부엌에 들어가기 싫었던지 그만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

‘아니, 눈을 감고 찾았던가?’

그러나 화성댁은 소리를 입 밖으로는 내지 못했다. 차라리 입도 벙긋하지 못하고 막막한 얼굴로 허공을 노려보았다.

“삼세번은 해야죠. 마지막으로 딱 한번만 더 응? 오빠?”

민숙이가 진석에게 착 달라붙으며 마지막 타령을 해댔다.

또 다른 집에서도 진석은 역시 빈손으로 나왔다.

“정말 이상해요. 우리가 부지깽이 훔칠 거라는 것을 동네 사람들이 다 알고 있었던 것 같아요.”

민숙이가 화성댁과 진석을 번갈아 보며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지금 그 생각을 하고 있던 참이다.”

때를 같이하여 곱사등이 점쟁이의 입을 의심하고 있던 화성댁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당장 달려가서 머리칼을 있는 대로 다 쥐어뜯어놓고 싶었지만 날이 조금만 더 밝아질 때까지 기다리기로 마음을 바꾸었다.

부지런한 새벽닭이 길게 목청을 뽑아대고 있었다. 세 사람은 입을 꾹 다문 채 허탈한 발걸음을 집으로 옮겨놓고 있었다. 희고 붉은 웃음으로 세 사람을 맞이하는 담 밑의 봉숭아꽃을 보며 민숙은 공연히 입을 삐죽거렸다.

“어머, 어머니! 화와!”

민숙이가 비명인지 감탄인지 도무지 분간하지 못할 그런 소리를 터뜨렸다. 그녀의 눈은 마당가에 꽂혀 있었다.

“그랬군. 아이쿠, 늙으면 죽어야지. 이 바보등신이 어쩌자고 그 생각을 못했누?”

딸의 눈이 꽂혀 있는 그곳으로 덩달아 눈길을 그은 화성댁은 가슴을 툭툭 쳤다.

마당가로 눈길을 그은 진석은 나란히 붙어 있는 두 개의 하절기용 아궁이를 보곤 ‘허’ 소리를 내며 목을 끄덕였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흘러내리는 판국에 방구들까지 데워가며 찜질할 일이 있겠던가. 그래서 집집마다 여름철이 되면 밥 짓고 국 끓이고 하는 아궁이를 마당가에다 따로 만들어서 사용해 왔다. 당연히 부지깽이도 바깥 아궁이 옆에 얌전하게 놓여 있는 것이 정상이었다.

진석은 발길을 곧장 옆집으로 돌렸다.

화성댁과 민숙은 따라가지 않았다.

곧 진석은 월척이라도 한 표정으로 부지깽이 하날 들고 돌아왔다.

동쪽을 향하여 선 민숙이와 진석은 부지깽이를 번갈아 세 번씩 발로 밟은 후 땅에다 깊이 묻었다.

광복을 맞이한 1945년 그 해 가을 민숙과 진석은 드디어 결혼식을 올렸다.

신혼부부의 살림집은 진석의 학교 가까운 곳으로 정했다.

신랑이 학교에서 돌아올 시간이 되면 민숙은 저녁밥을 짓다 말고 몇 번씩이나 거울 앞으로 달려가곤 했다.

고향에 남은 화성댁은 첫새벽이면 정화수를 장독대 위에 떠 놓곤 빌고 또 빌었다. 오로지 민숙이 아무 탈 없이 잘 살게 해 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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