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저편 <96>
오늘의 저편 <96>
  • 경남일보
  • 승인 2012.05.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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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록도에 가 있던 필중의 아버지는 얼마 전에 그곳을 탈출했다. 밤중에 몰래 아들의 얼굴을 꼭 한번만 보겠다고 집으로 찾아갔다가 아들한테 그 모습을 들켜버리고 만 것이었다.

“선생님, 우리 손자 맘 좀 빨리 잡게 해 줘유. 이 늙은이가 이리 간곡하게 부탁드립니다.”

노파는 두 손을 모아 숫제 기도하고 있었다.

‘가여운 녀석!’

진석은 술잔에 어리는 녀석의 모습을 보며 혀 꼬부라진 소리로 중얼거렸다. 생각하면 할수록 그런 몸으로 자식 앞에 불쑥 나타났던 그 아버지가 여간 미운 것이 아니었다.

자식의 얼굴을 한번만이라도 보겠다는 그 아버지의 간절한 마음을 이해할 수는 있었다. 절대로 동정표를 던질 수는 없었다. 만지고 싶고 안아 보고 싶고 눈이 짓무르도록 보고 싶으면, 손을 잘라버리고 가슴을 도려내고 두 눈을 다 뽑아버리는 한이 있어도 참아야 하는 것이었다.

‘너무 가혹해. 필중인 아직 어려. 부모 없이도 씩씩하게 잘 자라고 있는 아이에게 이게 무슨 짓이냐 말이다.’

혼란에 빠져 있을 필중의 마음에 동질감이 느껴져 진석은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회오리쳐 오는 분노를 느꼈다.

술잔을 들이키다 말고 진석은 눈물을 펑펑 쏟기 시작했다. 만남과 동시에 이별의 순간을 맞이하고 말았던 아버지의 모습이 자꾸만 눈앞에서 일렁거렸기에. 눈꺼풀로 동공을 사정없이 찍어 눌렀다. 혐오스럽지만 미워할 수 없는 그 모습은 술에 물든 망막의 파문 속에서도 돋아났다.

이제 진석은 귀를 막으며 목을 좌우로 흔들어댔다.

‘달아나! 달아나! 달아나란 말이야!’

아버지의 목소리는 확성기까지 달고 속귀에서 되살아나고 있었다.

“웬 참견? 참견하시지 마세요. 참견하시지 말라니까요?”

진석은 술에 푹 절여진 목소리로 어리광이라도 부리듯 중얼거렸다.

좀 마른 주인여자는 진석의 모노드라마가 폭력적인 행위로 돌변할까봐서인지 경계의 눈빛으로 힐끔힐끔 곁눈질했다.

‘필중아, 우리 아버지도 문둥병, 그래 문둥병자였어. 그런데 그게 뭐 어때서? 우린 멀쩡하잖아? 그러면 된 거야.’

진석은 입속말로 중얼거리며 벌떡 일어났다. 술에 꼬부라진 혀로 필중이 이름을 줄기차게 불러댔다.

“아니, 무슨 술을 이렇게 많이 마셨어요?”

골목입구까지 나와 있던 민숙은 휘청거리며 오고 있는 진석을 발견하곤 숨도 쉬지 않고 달려갔다.

“엇, 누구세요? 다가오지 마세요. 이 몸은 각시도 있고 색시도 있어요. 아니, 아니, 우리 민숙이까지 여자가 셋씩이나 있어요.”

진석은 일부러 횡설수설했다.

“꿈에도 그리는 삼천궁녀는 어떻게 하고 셋밖에 없다고 속이세요?”

민숙이도 덩달아 농담을 했다.

“민숙아, 나와 결혼한 거 후회하지 않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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