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자기 미학 속에 피어나는 융합기술
보자기 미학 속에 피어나는 융합기술
  • 경남일보
  • 승인 2012.05.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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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일현 (한국폴리텍대학 항공캠퍼스 학장)
어린 시절 우리는 수많은 꿈을 꾸었다 나비가 되어 날아볼 수는 없을까. 접었다 폈다 하는 자동차를 만들어 타고 다니다 밤에는 벽에 걸어놓고 잘 수는 없을까 등등의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펴며 다가올 미래에 가슴 설렜다. 이랬던 우리가 어릴 적 꿈은 꿈으로 접어둔 채 규격화된 양복을 입고, 하루 세끼 정해진 조리법에 따라 음식을 해먹고, 아파트 같은 규격화된 집에서 생활하는 등 삶 자체가 획일화되고 규격화돼 버렸다. 포화상태의 근대문명이 탈근대적 감수성을 키웠다고나 할까. 인간의 기계화와 규격화를 가져온 근대 서구적 가치가 재평가돼 뒤집히고 있다. 한때 위험한 인간형으로 인식됐던 사람들이 창의적인 인재로 각광받는다. 예술이 밥을 먹여주고, 아이디어는 상품으로 변했다. 대량생산된 상품은 넘쳐나 헐값에 넘어가는 반면 새로운 지식은 최고가를 구가한다. 창의는 최고의 상품이다. 세분화됐던 많은 영역이 벽을 허물고 다시 합쳐져 창의적으로 새로이 구성된다. 미술과 문학이, 공학과 감성이, 휴대폰과 사진기가 융합한다. 인공적으로 분리됐던 것들이 이처럼 자연적으로 합쳐지는 융합의 원리, 컨버전스는 우리 시대 존재의 핵심원리다. 새롭게 다가온 컨버전스 기술은 그동안 획일적인 근대화에 길들여진 우리에게는 매우 낯설고 충격이기까지 하다.

해결의 실마리를 보자기를 통해 찾아보자. 보자기는 부드러운 구조를 지녔다. 서구의 가방과 비교해 보면 보자기의 융합기능은 놀라울 정도다. 사물의 모양과 크기에 맞춰 자유자재로 펼 수도 쌀 수도 있다. 내용물이 보자기의 품에서 밖으로 삐져나와도 보자기는 기능을 그대로 유지한다. 어깨에 멜 수도, 등에 걸칠 수도, 손으로 들 수도 있다. 보자기의 기능이 이렇게 융합기술의 정점을 보여준다면, 보자기의 철학은 심오하기까지 하다. 보자기가 지닌 공간개념은 서구형 가방을 단박에 극복한다. 가방은 공간을 소유하고 난 다음에야 물건을 소유한다. 공간과 물체를 동시에 확보해야만 제 스스로 존재 가능한 비효율적인 존재이다. 이에 반해 보자기의 공간과 물건은 소유와 무소유를 자유롭게 오간다. 물건을 소유할 때는 공간을 허락하고 물건을 내어줄 때는 공간을 없앤다.

공간을 내어주고 없앰으로써 물체의 존재를 자유롭게 하고 동시에 제 스스로도 자유로워진다. 보자기의 공간은 서구형 가방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소유가 아닌 무(無)로서 소통시키는 하나의 ‘네트워크’인 것이다. 보자기 공간의 ‘있음’이란 바로 ‘이음’이다. 보자기는 내부공간과 외부공간의 ‘없음’과 ‘있음’ 사이를 잇는다. 우리의 삶에 자리 잡은 존재, 소유, 욕망이라는 가방문화는 근대의 한계성을 드러내고 있지만, 보자기에 내재된 미학적 특성은 21세기의 컨버전스 패러다임과 교차하며 다양하고 역동적인 환경에 무한 적응할 수 있다.

하나의 예제를 만들어보자. ‘세상기술이 아무리 발달해도 화장실이나 바둑판 같은 것은 크게 변할 수 없을 것이다’라는 사고가 일반적이다. 그러나 보자기 철학을 대입시켜 보면 펼치고 접고 둘둘 말아서 보관할 수 있는 바둑판을 만들 수 있다. 유연성이 있는 아몰레이드(amoled) 디스플레이를 이용해 바둑판을 그래픽화하고 화면을 손가락으로 터치하면 흰돌과 검정돌이 나타나게 된다. 또 쉽게 지울 수도 있다. 화면 측면에는 하드웨어 컨트롤 시스템 및 온·오프 기능을 둬 종이처럼 둘둘 말아서 가지고 다닐 수 있는, 보자기와 같은 바둑판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디지털기술은 이를 가능케 한다.

이처럼 디지털 융합시대의 컨버전스 제품은 기능의 차원을 넘어 형태와 공간을 조정하는 가변성으로 우리 삶의 모습을 바꿔 놓기도 한다. 제대로 된 기술융합 제품을 개발하고 자연스럽게 이용하기 위해서는 기능 이전에 정신적 토대가 뒷받침돼야 한다. 우리 한국인은 오랜 세월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일상의 생활문화 속에서 융합적 감수성을 키워 왔다. 디지털 융합시대의 진정한 주인이 되기 위한 첫걸음은 보자기에 깃들어 있는 ‘있음’과 ‘없음’의 네트워크적 미학을 제대로 이해하는 일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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