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저편 <105>
오늘의 저편 <105>
  • 경남일보
  • 승인 2012.05.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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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중이 아버지는 그 동안 방황하는 아들의 모습을 숨어서 다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죽음으로도 끊을 수 없는 것이 아버지의 정이라고 그렇게 이해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까. 진석은 보이지 말아야 할 모습을 자식 앞에 드러낸 그가 뻔뻔스럽다 못해 가증스럽기까지 했다.

진석은 양손에 끼었던 양말을 벗어 쓰레기통에 유감없이 버렸다. 세수 대야 가득 물을 떠선 몇 번씩이고 손을 씻어댔다.

농익은 하루가 석양에 내려 서쪽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빨랫줄에서 빨래를 걷어 개고 있던 민숙은 또 대문간으로 목을 돌렸다. 시댁에서 점심만 먹고 곧장 집으로 돌아왔던 그때부터 줄기차게 대문밖에 귀를 꽂아두고 있던 차였다.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챙겨들곤 안방으로 들어간 민숙은 넓지도 않은 방안을 휘 둘러보았다. 청소는 주로 아침나절에 해 왔는데 오늘은 하지 못했다. 평소에 별스럽게 쓸고 닦고를 해댄 덕인지 하루 정도 청소를 하지 않는다고 표가 날 정도로 지저분하진 않았다.

민숙은 다른 날보다 더 꼼꼼하게 비질을 하기 시작했다. 남편은 어쩌다 머리카락이 하나라도 눈에 뜨이며 줍고 다니는 성격이었다.

‘멀쩡한 양말을 왜 버렸지?’

쓰레받기를 털려다 말고 쓰레기통에 있는 양말을 발견한 민숙은 재빨리 그것을 주워들었다. 뒤꿈치 쪽이 좀 닳아있기는 해도 천 조각을 대서 꿰매면 아직 한참은 더 신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늦은 오후의 시간이 뙤약볕을 조금씩 거둬갈 때 진석은 도봉산 입구에 도착했다. 세상은 좌파와 우파로 나누어져 시끄러운 데다 이 산 저 산에는 빨갱이와 부랑배들이 숨어 있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었다. 이런 때에 산으로 오른다는 건 제 발로 호랑이 입속으로 들어가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산속의 해는 여름에도 길지 않았다. 더욱이 해가 지고 나면 어둠에 갇혀 꼼짝할 수 없게 되는 것이었다. 해가 떨어지기 전에 ㅇㅇ암자를 찾아야 한다는 일념에 사로잡힌 진석은 서둘러 산을 타기 시작했다.

크고 작은 돌부리가 불거져 거칠기만 한 길에는 나뭇잎 그늘이 내려 있었다. 오르기에 최면이 걸려 버린 진석의 얼굴엔 땀방울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더위에 지친 새들도 낮잠에 빠졌는지 산속엔 적막감만이 감돌았다.

산등성이에 이르기 전에 길은 두 갈래로 나누어지고 있었다. 그곳에 이른 진석은 난처한 표정으로 걸음을 멈추었다.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막막해진 것이었다. 양쪽 길을 번갈아 보며 한숨에 가까운 심호흡을 해댔다.

“누, 누구야!”

소리에 대하여 무방비상태로 있던 진석은 느닷없는 스르륵거림에 놀라 엉겁결에 비명을 질렀다. 숲에서 나온 누군가 뭉툭한 주먹으로 왼쪽방향을 쥐어박듯 가리키고는 오른쪽 길로 쏜살같이 달아나고 있었다.

‘아니, 당신은?’

진석은 달아나는 그의 등을 보며 직감적으로 필중이 아버지를 떠올렸다. 집의 대문 밖에서도 보아서인지 그 뒷모습이 결코 낯설지 않았다. 메스껍다는 얼굴로 이맛살을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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