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저편 <133>
오늘의 저편 <133>
  • 경남일보
  • 승인 2012.07.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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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이 몹쓸 병에 걸렸대. 소록도로 가야 한다나 봐. 비극의 주인공이 되어버렸으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는 걸 보면 그 사람은 운명론자임이 틀림없어. 딱 한 가지 사랑하는 아내와 헤어져서 살아야 하는 것이 무지 싫은가 봐. 아내에게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그것도 큰 걱정이고.”

진석은 민숙이가 잠들었다는 사실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계속 이야기를 이어갔다.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진다는 것이 이런 것일까?’

정작 민숙은 진석의 이야기를 다 듣고 있었다. 할 말을 빨리 털어놓지 못하는 남편의 마음을 읽고 있었기에 잠든 체 해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민숙은 가방을 챙겼다. 그녀는 우선 빨리 서울을 떠나고 싶었다.

이곳이 몸서리치도록 싫어진 건 아니었다.

다만 병든 남편과 함께 사람들이 많은 이곳에서 조용히 사라져 주고 싶은 거였다.

진석이도 의아해하지 않았다. 민숙이가 여자 옷가지들을 챙길 때 그는 남자의 옷가지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우리 학동에 가서 살아요.”

“그러지 뭐.”

둘은 일상적인 표정과 말투로 짤막하게 새로운 거처를 고향으로 정했다.

“저도 예전에 알아볼 만큼 알아봤는데 태어날 아기는 절대로 나균 보균자가 아니래요.”

민숙은 굳이 문둥병에 대하여 알고 있는 지식을 내놓았다.

“물론 우리 아기한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야.”

진석이도 쾌히 맞장구를 쳐주었다.

그리고 서울역에서 기차를 타고 화성역까지 올 때까지 둘은 입을 꾹 봉한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학동으로 향하면서도 줄줄 흘러내리는 땀만 연방 훔치고는 할 뿐 말을 하지 않았다.

마을 어귀의 정자나무는 겹겹이 쌓인 잎으로 그늘을 만들며 둘을 맞이했다.

“오빠, 약속해요.”

앞서가던 민숙은 별안간 몸을 홱 돌리며 무서운 얼굴을 했다.

“약속이라니?”

진석은 뭔가 찔리는 얼굴로 반문했다.

“우리 아기가 태어날 때까지는 절대로 나쁜 생각 같은 건 하지 않기로.”

그녀는 단단히 못을 박듯 윽박지르며 말했다. 남편이 가는 곳이면 어떤 곳이던 함께 갈 궁리를 하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

그는 담담하게 대꾸해 주었다.

그날 밤 진석은 남몰래 학동 뒷산으로 올라갔다.

아직은 목숨을 버릴 수 없었다.

만삭의 아내와 한 약속은 지켜야 하기에.

산의 왼쪽 겨드랑이로 간 진석은 덫에 치인 짐승처럼 울부짖기 시작했다.

한 남자의 한스러운 ‘우우우웅웅웅’ 소리가 깊고 깊은 산의 가슴까지 울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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