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저편 <136>
오늘의 저편 <136>
  • 경남일보
  • 승인 2012.07.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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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난 준빌하라고? 배가 남산만한 애를 데리고 어디로?”

화성댁은 멀어져 가는 정자를 향해 소릴 지르다간 답답한 가슴을 툭툭 치며 딸의 집으로 달렸다.

정자가 동네방네 외고 다니지 않았는데도 마을은 술렁이고 있었다. 피난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벌써부터 사립문을 나서는 잽싼 사람들도 있었다.

“또 누가 온 것 같은데???”

뒷방에서 지내고 있던 진석은 귀를 방문 밖으로 내밀었다. 식기 전에 먹어야 한다는 민숙의 성화에 못 이겨 삼계탕을 한 술 뜨던 중이었다.

“누구지? 나가보고 올게요.”

민숙이도 대문을 잡아 흔드는 소리를 들으며 바짝 긴장했다.

“민숙아, 이년아 에미다. 빨리 문 열어라.”

불난 가슴은 누르며 화성댁은 딸을 불러댔다.

“왜 또 오셨어요?”

대문을 열며 민숙은 화부터 냈다.

“이년아, 에미하고 원수졌니?”

화성댁도 급한 마음에 성난 얼굴로 맞받아쳤다.

“아, 아뇨. 자꾸 이래 와서 떠들면 오빠 고등고시는 어떻게 붙겠어요?”

민숙은 아린 가슴을 꼭꼭 숨기며 변명을 늘어놓았다.

“이년아, 고등고시고 나발이고 큰일 났다.”

“큰일이라뇨?”

순간 민숙은 진석의 비밀이 탄로나 버린 것만 같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빨갱이가 쳐들어왔대.”

“에엣? 누가 그래요?”

놀란 민숙은 눈꺼풀을 정신없이 찢어발겼다.

“형식이 댁이 서울에 갔다가 소문을 듣고 왔어. 마을사람들은 피난을 가고 있는데 어떡하면 좋으냐?”

화성댁은 딸의 배를 곁눈질하며 낭패스런 얼굴을 했다.

“어머니, 이제 우린 어떡해요. 어떡하면 좋아요?”

초주검이 되어버린 얼굴로 민숙은 화성댁의 손을 꼭 잡았다. 그녀는 함께 피난길에 오를 수도, 혼자 남겨두고 갈 수도 없는 남편 때문에 가슴뼈가 탁탁 튀는 것이었다.

“산달은 내달이니까 우선 피난을 떠나자. 김서방한테 빨리 알리지 않고 뭐하고 있니?”

마음이 급해진 화성댁은 딸을 채근했다.

“몸이 무거워서 오 분도 못 걷는데 어떻게 피난을 가요.”

혼잣말로 중얼거린 민숙은 몸을 뒷산으로 돌렸다. 수목들이 다투어 초록의 손을 내밀며 부드러운 능성을 만들고 있었다. 여름이어서 제철을 만난 잡초들은 키 자랑을 하며 산속으로 들어가는 길들을 죄다 막아버렸다. 풀들 사이를 비집고 뒷산으로 들어가 꼭꼭 숨어 있으면 될 것 같았다.

“이년아, 김서방한테 업혀서라도 피난을 가야 한다. 빨리 김서방한테 알리라니까 뭐하고 있니? 이 어미가 하랴?”

화성댁은 딸을 옆으로 밀치며 대문 안으로 쳐들어갈 기세였다.

“아, 알았어요. 제가 말할게요. 어머닌 돌아가 계세요.”

민숙은 기겁을 하며 화성댁의 진입을 딱 가로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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