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수곡농민항쟁은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농민운동사에 가장 주목받는 역사적 사건이다. 임술년 농민항쟁으로 불리는 농민항쟁은 진주 수곡에서 발단, 전국으로 확산돼 농민 스스로가 부조리에 저항하고 지역민의 안녕을 추구했던 민본항쟁이며, 조선 후기 민권투쟁 가운데 손꼽는 것이다. 진주에서 시작된 농민항쟁은 전국으로 번져 나갔고 당시에 진주지역 내의 모든 농민들이 동참했다.
19세기 중반에 이르러 삼정의 문란으로 수취체제는 붕괴되고 탐관오리의 횡포는 헤아릴 수 없었다. 농민항쟁의 결과 봉기의 원인이 됐던 백낙신 우병사의 탐학에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하나 유계춘 등 110여 명을 봉기의 주동자로 체포해 13명은 사형에, 19명은 유배형에 처해졌다. 그로부터 150여 년이 흐른 지난 18일은 당시 농민항쟁 주동자들이 사형에 처해진 날이다. 농민항쟁이 있은 지 150년 만에 농업인단체협의회는 수곡면 창촌리 농민항쟁기념탑 건립현장에서 ‘진주농민항쟁 희생자 위령제’를 열었다.
진주는 역사적 고비마다 농민항쟁, 형평운동 등 중요한 선구자적 역할을 해 왔다. 진주농민항쟁은 우리나라 최초로 평화를 향한 백성들의 대행진이었다. 수곡농민항쟁은 불의에 항거, 백성들이 스스로를 지키고 지역민의 안녕과 권익을 위하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전국으로 발산되었던 것으로 150년 만에 숭고함을 되새기는 넋을 기리는 위령제와 기념탑 건립은 의미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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