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저편 <157>
오늘의 저편 <157>
  • 경남일보
  • 승인 2012.08.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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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쪽 깊은 곳까지 쳐들어갔던 인민군들은 퇴로를 타단당한 채 당장에 갈 곳이 없어졌다. 놈들은 주로 산에 숨어 지내다 밤을 틈타 마을을 습격하곤 했다. 산골에 사는 사람들은 전선도 없는 전쟁이 휘말린 채 불안한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뒷산을 등지고 있는 학동은 놈들의 구둣발을 용케도 잘 비키고 있었다. 이웃하고 있는 산들의 저쪽 편에 있는 마을은 놈들이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았다는 소문이 바람에 실려 다니곤 했다.

 인민군들의 군화를 잘 피한 덕택일까. 학동은 신령한 정자나무가 마을을 지켜주고 있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돌기도 했다.

 “이것으로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잖아요?”

 조카인 용진을 안은 동숙은 동생인 진석이가 칩거하고 있는 뒷방으로 안타까운 연민의 눈길을 그었다.

 “그냥 가자.” 

 여주댁은 새까맣게 타는 속을 숨기며 싸늘하게 말했다. 나병환자인 아비에게 얼굴 한번 잠깐 보여준다고 그 병이 전염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쯤은 그녀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여주댁은 목을 허공으로 들었다. 남편 김 씨의 얼굴이 기다렸다는 듯 둥그렇게 떠올랐다.

 ‘가여운 사람!’

 굴속에 숨어 지내다가 밤이 깊어지면 아들을 보기 위해 집으로 내려오곤 했다. 잠든 진석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며 웃음과 눈물을 소리 없이 버물리곤 했다,

 “오빠, 잠깐만 나와 보세요.”

 동숙에게 무언의 눈짓을 받은 민숙은 뒷방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남편의 눈에 용진의 모습을 넣어놓아야 했다.

 “민숙아, 그냥 보내.”

 진석은 문도 열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

 울상이 되어 앞마당으로 쪼르르 달려간 민숙은 동숙의 귀에다 대고 귓속말을 했다.

 알았다는 듯 목을 끄덕거린 동숙은 용진을 안고 대문간으로 향했다.

 여주댁도 비로소 안심했다는 얼굴로 발걸음을 대문간으로 옮겼다.

 “올케 우리 동생 잘 부탁해. 용진이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서울로 달려오고 알았지?”

 동숙은 민숙에게 이것저것 일러주며 발걸음을 은근히 늦추었다.

 “뭣들하고 있냐? 이러다 기차 놓치겠다.”

 마음이 급한 나머지 한발 앞서 대문 밖으로 나간 여주댁은 딸과 며느리를 번갈아보며 재촉했다.

 “어머니 죄송합니다.”

 때를 기다리고 있던 민숙은 입을 조금 벌리고 있던 대문을 재빨리 닫곤 빗장까지 걸어버렸다.

 “얘들아, 이러면 안 돼. 그냥 데리고 가야 해.”

 비로소 딸과 며느리의 작전에 휘말려들었음을 알아차린 여주댁은 대문을 두드리며 절망했다.

 “어머니, 잠깐 정말 잠깐 얼굴만 보여줄게요.”

동숙에게서 용진을 받아 안은 민숙은 뒷마당으로 향했다.

 “악아, 제발! 지긋지긋한 병은 이제 끝내자꾸나. 네 자식한테까지 대물림하지 않도록 하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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