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저편 <162>
오늘의 저편 <162>
  • 경남일보
  • 승인 2012.08.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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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거 놔. 놔란 말야.”

 화심은 잉잉 울며 악을 바락바락 썼다.

 대문 밖의 소리를 고스란히 다 듣고 있던 민숙은 진석의 귀를 의식하며 뒷마당으로 향했다.

 나병이 발병하고 난 후 귀가 더욱 밝아진 진석은 대문 밖에서 나는 소리를 다 듣고 있었다.

형식의 목소리가 들려오면서부터 피가 거꾸로 솟구치고 있었다. 어디 드러내놓을 수도 없는 고독한 자존심이 꺽꺽 울음을 울기 시작했다.

죄 없는 책을 마구 찢기 시작했다.

 “이것도 찢어요.”

 민숙은 멀쩡한 모양들을 하고 있는 책까지 남편 앞으로 밀어주었다.

 “만지지 말라고 했잖아?”

 진석은 소리를 버럭 질렀다.

 “괜찮다구요 괜찮아!”

 민숙이도 덩달아 소리를 질렀다. 이렇게 소리라도 질러야 미치지 않고 살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아들 용진을 서울로 보내고 난 후 하루에도 몇 번씩 이렇게 남편과 목청 뽑기 내기를 해 대는 것이었다. 그녀도 살고 동정 받기 싫어하는 남편의 고고한 마음을 지켜주기 위해서였다.

 “그래. 소리라도 질러라. 이 어미 간다. 문 걸어라.”

 화성댁은 대문간으로 걸음을 옮겼다. 

 “형식이한테 오빠 이야기 절대로 하지 말아요.”

 민숙은 정색을 했다.

 “이년아, 죽은 사람 이야길 내가 왜 하누?”

 화성댁은 딸을 사납게 흘겨보았다.

 어머니의 뒷모습이 아직 코앞에 있는데 민숙은 대문을 닫아걸었다. 젖이 퉁퉁 불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안방으로 달려가선 그릇을 받쳐놓고 젖을 꾹꾹 짜기 시작했다. 뽀얀 용진의 얼굴이 눈앞에서 돋아나고 있었다.

 ‘용진아, 미안하다. 미안하다 용진아!’

 민숙은 중얼중얼 주문을 외고 있었다. 아들을 생각하면 미안한 마음부터 꿈틀거리는 건 어머니의 삶 대신 아내의 삶을 선택했기 때문이었다.

 “아니, 왜 남의 집에 와 있나?”

 사립문으로 들어가던 마루에 벌렁 드러누워 있는 형식을 보곤 놀랐다.

 “아주머니, 이제 누나 어떡하면 좋아요?”

 형식은 울음이 붉게 충혈 된 눈으로 화성댁을 바라보았다. 언제나 그의 편이 되어 주었던 그녀에게 민숙을 향한 변함없는 마음을 응원 받고 싶었다.

 “어떡하긴 어떡해? 순희 엄마는 만났나?”

 공연히 짜증이 난 화성댁은 쌀쌀하게 대꾸했다.

 “아, 아뇨. 아직 피난 갔다 돌아오지 않았는지 집이 비어 있습니다.”

 예전과는 전혀 다른 화성댁의 모습에 형식은 찔끔했다.

“사람이 그러는 법이 아니네. 이 난리 통에 처자식부터 챙겨야지 안 그래? 빨리 처갓집으로 가 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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