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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공 들고 온 선교사들, 근대체육 보급허정기가 서술하는 진주체육사 <1> 日帝下의 진주체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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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2.09.04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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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체육인들이 나라 뺏긴 설움을 달래기 위해 일본인 악질 형사 ‘도꾸대’를 두들겨 패기 위해 잠복했던 (구) 국보극장 자리. 지금은 상가들이 들어서 있다.

1910년 경술국치(한일합방) 조약이 조인되자 온 국민은 일제의 무단정치에 희망과 의욕을 상실하고 망국의 설움에 잠겼다. 그러나 민주독립은 오로지 자력의 힘만으로 이룰 수 있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는 동시에 용기 없는 국민, 건전치 못하는 신체로서는 아무 것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껴 국민의 강건한 신체단련과 올바른 민족정신의 함양이 시급한 선결문제임을 각성하게 되었다.

이같은 상황에서 1920년 4월 10일부터 3일간 동아일보에 평파(平坡) 변봉현(邊鳳現)씨가 당시의 민족지였던 동아일보에 ‘체육기관의 필요를 논함’이라는 논제로 체육발전을 위한 체육기관의 조직을 주장하여 같은 해  7월 13일 조선체육회의 발족을 보게 되었다.

이후부터 조선체육계는 비로소 조직적인 체계를 갖추게 되는 한편 점차 우리 민족의 탁월성이 나타나 일본인들을 압도하고 전일본의 스포츠계를 제압하다시피 했다. 특히 1936년 8월 9일 제11회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우리의 손기정 남승룡 두선수가 참가하여 손기정 선수는 세계 신기록으로 우승을 차지하고 남승룡선수는 3위로 입상하여 한국체육의 존재와 그 우수성을 세계 만방에 과시했다.

진주체육회 활동은 다른 도시에 비해 상당히 빨랐다. 동아일보 1920년 7월 5일자 신문에 게재된 ‘진주체육회 활동-경남’ 기사에 “진주는 고래(古來) 유명한 도시로 경남의 도청 소재지라 종(從)하야 유위(有爲)의 청년이 다수(多數)하나 이를 지배할만한 기관이 무(無)하야 장래 다망(多望)의 청년 자질로 하여금 낙오자 되게함이 어찌 개탄(慨嘆)치 아니할 바리오. 수개소의 청년을 지배하는 기관이 유하나 유명무실에 속하여 일반 청년계는 비참의 경(境)에 함(陷)이 불무(不無)하던 바 금번 모모(某某) 제씨(諸氏)가 여차한 고식적 발전으로는 원만한 해결을 얻지 못할 줄 자각하고 진주체육회를 조직하고 그 취지를 일반에 피로(披露)할 겸 제주(諸住) 인사의 동정을 득하기 위하야 5일 간 문사극(文士劇)을 흥행하야 다대한 동정을 박득(博得)하였는 바 동회에서는 채육에만 노력할 것이 아니라 문예부, 음악부를 취하야 이후 대활동을 개시하리라더라(晉州發)”고 게재된 것을 보면 1920년 발족한 진주체육회가 다른 도시에 비해 상당히 일찍 체육회 활동이 시작된 것을 알 수 있다.

당시에는 진주체육회 뿐 아니라 진주청년 체육회, 기독교 청년체육회 등이 조직돼 활동해 오다 진주체육회로 통합됐으며 그 이후 일본인들이 조직 운영해 오던 진주체육회로 강제 통합이 되었다.

경술국치(한일합방) 후 진주의 근대 체육은 선교사에 의해 보급됐다. 광림교회(호주선교회 소속)가 설립되고 선교사들에 의해 축구공과 야구 글러브 및 밋트가 들어옴으로서 전통체육이 아닌 근대스포츠의 새장이 열리게 됐다.

“당시 광림(光林)학교(공민학교에 해당)에는 제1 보통학교와 제2 보통학교에 진학 못한 나이 많은 학생들이 편입하게 됐는데 광림보통학교 축구부에는 처음에 이현찬, 김대중, 박학두씨가 중심이 돼 조직됐고 얼마 후에 고병열, 정일영씨가 합류하게 됐다. 또한 천도교 축구단에는 박택희, 정수만, 별명이 앵고다리(CF)인 선수들이 있었는데 당시에는 정규 축구장이 없었으므로 풀백(FB)이 없이 9명으로 중안동에 있던 청년운동장(계동 전 구세군 자리)에서 경기를 가졌는데 광림학교의 브라스밴드가 동원돼 열띤 응원전을 펼쳐 경기장 분위기를 고조시켰으며 많은 사람들이 처음 보는 양악기인 큰북, 카스타넷, 트럼펫, 스자폰 등을 구경하기 위해 모여들었다고 한다. 야구는 일본인들이 주로 하였으며 팀은 조직이 안 되고 켓치볼 정도로 즐겼다고 한다.” - 故 권창세(전 경남일보 상무·진주축구협회장)씨 증언

축구단은 박학두씨를 중심으로 한 ‘진주청년축구단’이 결성됐으며 한편으로는 강수영씨를 주축으로 정수만, 서종숙, 박학조씨가 단기 연호를 딴 ‘4257축구단’을 창설하였다.

‘4257’은 우리의 단군연호를 상징하는 것이라며 일본 경찰이 불온단체로 규정짓고서 책임자인 강수영씨를 구금하고 팀을 강제 해산시키고 말았다.

그 당시 나무전 거리의 우리 영상인(떡장사 등 노점영상인)들을 못살게 하던 일본인 악질 형사 ‘도꾸대’를 청년 체육인들인 박남권(유도 유단자), 신기순, 권창세, 김두용, 이영재씨 등이 붙잡아 혼을 내주기로 하고 진농출신 우정환씨가 일본으로 원정가기 전날 밤 ‘사꾸라 마찌’(구 국보극장 자리)의 시장 안 막사에서 잠복해 있다 수정동 기생집에서 술을 마시고 장대동 집으로 귀가하던 ‘도꾸대’ 형사를 박남권이 둘러 메 쳐박고 두들겨 팬 뒤(한달가량 출근 못함) 산청 원지에 있던 유성렬씨 집으로 도망을 가 은신하는 등 젊은 혈기로 나라 뺏긴 설움을 달래기도 했다. 

그리고 제1보통학교(현 진주초교)와 제2보통학교(현 봉래초교)에서도 백호(코치 박대준), 맹호 소년축구단이 결성됐는데 정진국, 김수생, 김지호, 문진, 차똥구루마(별명) 등이 주축을 이루었다.

이처럼 진주에는 축구 붐이 조성됐고 드디어 진주청년 올팀을 조직하여 서울에서 개최된 전국대회에 유사 이래 처음으로 출전하게 됐는데 당시 이 대회에는  경성팀과 평양팀이 출전하여 뛰어난 기량을 과시하였으며 특기할 사항은  이 대회 참가를 계기로 중국 상해팀을 진주로 초청, 청년운동장에서 친선 경기를 가졌는데 상해팀의 드리볼 재간과 헤딩기술을 보고서 진주 선수들은 새로운 축구기술을 터득하게 됐다고 한다.-故 권창세씨 증언

한편 야구도 차츰 인기를 얻어 팀을 구성하게 됐는데 성인팀으로는 ‘구도구야’ 운동구점 주인이 중심이 되고 제1보통학교의 ‘이노우에’ 선생이 투수, 심상소학교의 ‘노다’, 시청에 근무하던 ‘노브아시’ 등으로 아카시아팀이 조직됐다. 소년 야구팀으로는 제1보통학교와 제2보통학교팀이 조직됐다. 제1보통학교에는 이만영(투수), 권창세(투수)씨 등이 제2보통학교에는 서병문, 강문수(가수 남인수)씨 등이 있었다.

그후 1922년경에 청년야구단이  일본인과 혼성으로 팀을 만들고 마산팀과의 친선경기를 제1보통학교 운동장에서 가지기도 했다.

이때 야구팀에는 김찬태, 유재춘(서울 휘문고보 퍼스트출신), 정인구(휘문고보 출신, 하와이 원정 경력)씨 등이 활약했다.

그리고 소년 체육팀의 활동이 발전돼 진주고보에 맨 먼저 축구팀이 조직됐는데 김용대, 김지호, 김무세, 송봉조(GK), 김용진, 정봉문씨 등이 활약했으며 진주농림에는 이만영, 우정환씨의 형 등이 활약했다.

또한 진주에는 연식정구팀이 있었으며 일본인 육상 코치가 부임해 오자 육상을 적극 권장하여 좋은 기록을 내기도 했다.

진주복싱 탄생의 선구자였던 정봉문씨는 진주고보 3학년 1학기때 일제의 내선공학회(內鮮共學會)에 반대하는 스트라이크의 주동자로 몰려 퇴학을 당했다. 정씨는 서울 경신고보로 전학하여 단체운동 보다는 개인운동을 하는 것이 우승하기가 쉬울 것이란 생각으로 처음 유도를 배웠으나 일본인들의 벽이 높아 포기하고 다시 검도를 시작했으나 이 또한 기술습득이 어려워 그만 두었다. 그러던 중 진주 출신의 홍우인(洪又仁, 권투 유도를 잘 했음)씨를 만나 서울 YMCA 권투도장에 2원 80전의 입회비를 내고 들어가 열심히 운동을 한 결과 1929년 6월 제3회 전 조선 권투선수권 대회에서 페더급 우승을 차지해 진주의 권투 실력을 전국에 과시하기도 했다. 또한 방학 때 고향 진주로 올 때는 권투 글러브를 사 가지고 와서 봉래동 향교 앞 대청마루에 빽을 매달아 놓고 후배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이때 권투를 배운 박수영, 김문호씨 등이 조선신궁 봉찬 체육대회(朝鮮神宮奉贊體育大會)에 나가 우승을 차지하는 등 진주복싱을 전국에 알렸다. 그러나 일제말기에는 권투가 양키운동이라며 일제가 하지 못하도록 해 권투를 계속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故 정봉문(전 진주복싱연맹 회장·천황식당 대표)씨 증언.

 

전 진주MBC 보도국장

진주시체육회 부회장 및 경남축구협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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