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伏吟)
그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이르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하니, 그들이 이르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대제사장들이 그 은을 거두며 이르되 “이것은 핏 값이라 성전고에 넣어 둠이 옳지 않다” 하고 의논한 후, 이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으니,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그 밭을 피밭이라 일컫느니라.(마 27:3-8)
“예나 지금이나 똑 같은 수레바퀴 자국처럼 역사는 굴러가는데, 앞에서 실패하였거늘 뒤에 경계할 줄 모르고, 끝없이 같은 실패를 거듭하고 있으니, 참으로 통탄할 일이옵니다.” 당시 조정 부정부패에 대한 퇴계 이황선생의 통절한 상소문이다. 부정부패는 이황의 통탄스런 상소문 이후 460여년이 흐른 지금도 반복된다.
세월이 지난 다음 사람들은 스스로 가슴을 치며 통탄한다. “아 그 때 내가 왜 그랬을까?”, “아 그 때 내가 그러지 말아야 하였는데….”, “아 그 때 내가 그렇게 하여야 하였는데….” 부나비는 타죽을 줄도 모르고 불만 피우면 불속으로 날아들어 스스로 불타 죽는다. 이처럼 사람들은 엎드려 통탄하며 후회할 일들을 끝없이 반복한다. 왜 사람들은 똑같은 어리석음을 반복하고, 하고 난 뒤 남들에게 말 못하고 엎드려 속으로 끙끙 앓으며 땅을 치며 통곡할까? 너나없이 왜 이럴까?
이런 정신 빠진 일들을 설명하려는 명리적 개념이 복음(伏吟)이다. 복음은 상황을 헷갈려 판단하는 오류를 설명하려는 개념이다. 복음이란 일주와 똑같은 것이 원국에 있거나 대운 또는 세운에서 오는 것을 말한다. 똑같은 일주가 원국에 하나 더 있든지, 세월에서 온다는 것은 복제된 자기 자신이 하나 더 있든지 또 온다는 것을 말함이다. 복제된 인간, 이것을 '도플갱어'라고 한다. 이 세상에서 자기 자신은 오직 하나여야 하는데 자기 자신이 하나 더 있으니 자기 자신도 헷갈리고 다른 사람들도 혼동하는 현상이 일어난다. 하기에 복음이 올 때는 대개 정신이 나간다. 자기도 모른 사이에 얼빠진 일들을 한다. 당하지도 않아야 될 일을 당하든지,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복수할 일을 착각하여 자기 자신에게 한다든지, 그저 멍한 상태로 넋이 빠진 일들을 한다든지 한다. 이런 일들이 자신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타인에게 말 못하고, 소리 내지도 못하고, 혼자서 끙끙 앓아 대기만 한다. 원국에 있는 경우에는 신체의 건강문제, 정신적인 문제, 성적인 문제 등으로 표출된다. 여자의 경우 같은 일주가 나란히 같이 있으면 재혼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는 이론적인 측면이고 그렇지 않을 경우도 있다. 별 일을 하지 않는 경우 이 복음현상은 일어나지 않는다. 하기에 따지고 보면 복음은 길한 것도 아니고 흉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단지 판단과 의사표현 시에 얼이 빠져 범할 수 있는 오류일 뿐이다. 필자의 임상에 비추어 볼 때 복음의 이론과는 달리 복음일에 더욱 힘이 실려 자신 있게 표현하고, 횡재하는 경우도 더러 보았으니 복음을 마냥 꺼릴 것만은 아니라고 본다. 이 역시 마음먹고 활용하기 나름이 아닌가 한다.
무릇 명당(明堂)과 길지(吉地)는 땅과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좋아하고 미워하는 다른 이들의 마음속에 담겨있으며, 호운(好運)과 불운(不運)은 팔자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팔자를 바라보는 우리의 정신과 마음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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