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중위 (고려대학교 초빙교수)
필자는 1970년대 말에 이런 글을 쓴 적이 있다. “유권자들은 극단적 개인주의와 극단적 평등주의, 극단적 자기소외와 극단적 자기확대, 극단적 무관심과 극단적 참여욕구로 ‘전부(全部) 아니면 전무(全無)(all or nothing)’식의 반(反)정치적 정치행태를 표출시키고 있는데 정당은 아직도 낡은 계산기로 컴퓨터에 대응하려는 자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정당을 중심으로 후보를 선출하고 새로운 인물을 충원하려는 노력도 없이 다음 선거를 위해 무소속 후보와의 단일화에만 매달리고 있으니 정당은 점점 더 무력화되고 무당파(無黨派)만 늘어나게 마련이지 않겠는가 말이다.
미국의 어느 하원의원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정책을 가지고 있는 것은 공화당이나 민주당이 아니라 환경단체나 노동자 단체, 상사단체나 이익단체들이다. 우리는 그런 유(類)의 정당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이다. 심지어는 ‘감자당이나 고구마당 내지는 고추당이나 마늘당이 태어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아닌가’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얼마나 다급했으면 미국에서마저 이런 말이 나오게 되었겠는가. 우리에게도 예외가 아니다. 정당이란 무엇인가. 그런 유의 단체들이 주장하고 있는 정책들을 수렴하여 국정에 반영하는 존재가 바로 정당이 아닌가. 그런 수렴능력을 상실하면 어느 나라에서이건 결국 정당의 기능은 퇴화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각종 선거에서 보여준 각 정당의 후보자 선출문제는 더욱더 국민으로 하여금 정당을 외면하게 만들고 있다. 몇 차례에 걸쳐 치른 지방선거에서 특히 야당인 민주당이 벌인 후보공천의 양태를 보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행태였다. 정당의 존립 자체를 부인하지 않고서야 어찌 저런 공천이 있을 수 있을까 싶은 경우가 한두번이 아니었다.
소위 야권연대라는 정치행위를 일컬어 하는 얘기다. 서구에서 이루어지는 어떤 연대에서도 정당과 무소속이 연대하는 경우는 별로 들어보지 못했다. 정치적 정향(定向)이 비슷한 정당들끼리 연대하여 선거를 치른 다음 그 지분에 따라 연립정부를 구성하는 것이 다당제(多黨制) 정치체제 하에서의 일반적 관행이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에는 정당이 무소속 후보와 연대하기 위해 경선까지 치렀다. 그것도 지난 서울시장 후보경선을 보면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 벌어졌다. 당내 경선으로 당선된 후보자가 다시 무소속 후보와 경선하는 해괴한 일이 벌어 진 것이다. 무소속 후보가 다른 무소속 후보와 경선하는 것이야 그들의 자유다. 그러나 당내 경선에서 당선된 후보를 무슨 연유로 또다시 무소속과 경선을 하게 하는가. 무소속 후보는 누구를 대변하는 자이며 누구로부터 경선되어 후보자가 되었기에 정당후보와 함께 경선하는 것인가. 정당후보를 지지해준 당원들의 표는 어디서 찾아야 하는 것일까.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다. 정당이 정당이기를 포기하는 광대 짓이라 할 것이다.
이제 또다시 대통령 후보에서까지 무소속 후보와 정당후보가 경선을 통해 후보 단일화를 하겠다고 논의하고 있으니 반정치적인 행위도 이런 반정치가 없다. 무소속 후보는 입당의 대상이거나 영입의 대상은 될지언정 단일화의 대상은 될 수가 없다. 본질이 다르기 때문이다.
만약의 경우 무소속 후보로 단일화된다면 결국 민주당은 독자적인 후보도 내세우지 못한 채 대선을 치러야 할 형편이 된다. 언론에서 말하는 것처럼 불임(不姙)정당이 되는 것이다. 정당이 지니고 있는 가장 원초적인 기능인 공직후보 선출기능도 공직 담임기능도 새로운 인물 충원기능도 모두 포기하고 말았으니 앞으로 어떻게 정당으로 존립할 근거를 찾을는지 참으로 답답하고 안타까운 일이다.
무소속 후보에 대한 국민적 지지도야 높건 낮건 관계없이 정당은 정당대로 당당하게 후보를 앞세워 다음 정권을 차지하겠다는 의지를 국민 앞에 보여주는 것이 참다운 정당의 자세다. 민주당은 기어코 불임정당이 되고자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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