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저편 <229>
오늘의 저편 <229>
  • 경남일보
  • 승인 2012.11.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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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숙은 몸을 돌렸다. 읍내로 가 봐야겠다고 마음을 고쳐먹은 것이었다. 어머니가 갈만한 데가 별안간 생각난 건 아니었다. 더는 찾아볼 데가 없어서 이리저리 다녀볼 궁리도 하고 발광도 해 보는 것이었다.

‘저, 저년이 미, 민숙아??.’

그러나 화성댁은 소리를 입 밖으로 내지는 못하고 있었다. 땅을 파다 말고 그녀는 멀어져 가는 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봐야만 했다.

‘자식 키워나 봐야 소용없다는 말이 왜 나왔겠어?’

화성댁은 스스로를 달래며 호미질을 중단했다.

하루를 열심히 밝혔던 해가 쉴 곳을 찾아 서쪽하늘 아래로 드러눕고 있었다. 산 그림자마저 걷힌 학동은 이내 어둠에 잠겼다.

화성댁은 엉금엉금 기어서 산을 내려오고 있었다. 왼발에 힘을 줄 수 없어서 간신히 일어선다고 해도 발을 옮겨놓을 수가 없었다. 그럴수록 집으로 빨리 가야만 한다는 생각이 집요하게 머리를 볶아대고 있었다.

아침저녁으로 불어오는 쌀쌀한 바람이 사람들을 방안으로 밀어 넣었을까. 덕택인지 마을길엔 사람의 발길이 뚝 끊겨 있었다.

집까지 온 화성댁은 사립문 안으로 들어가며 안도의 한숨부터 길게 내뿜었다. 부엌으로 들어가선 문을 안으로 걸어 잠갔다. 넓지 않은 부엌 안을 오른발로 껑충거리며 옮겨 다니며 일손을 부지런히 놀리기 시작했다.

민숙은 또 친정집으로 부르르 달려 왔다.

‘이년아, 젖이 덜 떨어졌냐?’

딸의 기척을 느낀 화성댁은 문으로 등을 돌리며 치마를 넓게 펴 아궁이의 불을 가렸다.

‘어머니, 대체 어디 가신 거예요?’

불빛이 새어나오지 않는 방문을 보며 민숙은 울먹이는 소리로 중얼거렸다. 텅 빈 방안으로 들어가서는 왈칵 쏟아지는 눈물을 손등으로 훔쳤다. 발길을 돌리다간 어슴푸레하게 보이는 댓돌 위를 손으로 더듬어보기도 했다.

‘이 어미 아직은 못 죽는다. 걱정 말거라.’

딸의 마음을 고스란히 다 느끼고 있던 화성댁의 눈에도 눈물이 고이고 있었다. 오른발의 상처를 묶은 옷고름 위로는 피가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그녀는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말도 없이 구름 속으로 들어가 버렸던 달이 하늘 한가운데로 허여멀쑥한 얼굴을 드러냈다. 할일도 없는 별들은 빛 튀기기 잔치라도 벌이는지 반짝이는 눈망울을 땅으로 쏟아내기 바빴다.

이윽고 화성댁은 냄비 위에 넓게 펴 놓은 삼베보자기에 약병아리 고은 것을 쏟았다. 맑은 액체가 아래로 쭉 빠지기를 기다렸다가 보자기를 오므려선 있는 힘을 다하여 나머지 진액을 짜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찌꺼기는 텃밭으로 가져가 깊이 묻었다.

사방이 너무 고요해서 새끼개미 기어가는 소리까지 들릴 지경이었다.

‘오늘 내가 내 새끼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은 이제 다 했어. 내일 아침 해를 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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