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학수 (수필가, 산청문화원 향토문화연구소장)
문득 강원도 홍천의 용간난 할머니의 모습이 떠오른다. 빈천한 살림을 꾸리기 위해 약초를 캐러 간 남편 이봉두씨가 무심코 담뱃불을 던져 그만 국유림을 태웠다고 한다. 홍천국유림관리소는 이씨의 어려운 사정을 감안해 산불피해 변상금 130만원을 분할 상환하라고 명령 조치했다. 그러나 남편은 중풍을 앓다가 이듬해 죽으면서 “여보, 나 대신 당신이라도 그 벌금을 꼭 갚아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는 남편에게 부과된 벌금을 벌기 위해 허리가 휘도록 품팔이를 했지만 여전히 면치 못한 가난 때문에 걱정만 쌓였다. 4남매를 홀로 키우며 매년 농사를 지어 꼬박꼬박 갚다가 그것도 모자라고 힘들어 일당 만원도 안되는 허드렛일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마침내 남편이 저지른 산불피해 변상금 130만원을 무려 20년여 년에 걸쳐 갚아낸 순박한 산골여인. 벌금을 완납한 그날, 이 시대 바른 양심의 농촌 아낙네의 그 한마디를 잊을 수가 없다.
남편과의 약속, “나라빚이 있다는 생각에 밤잠을 자지 못하고 가슴 한구석이 항상 답답했는데 정말 마음이 후련합니다. 이제는 남편도 저승에서 편히 쉴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쯤 팔순을 눈앞에 둔 신뢰의 정직한 그 할머니, 남편의 유언을 실천하기 위해 생계조차 어려운 가난 속에서도 국가에 대한 준법정신과 책임감은 물론 사회정의 구현과 진솔한 양심에 어느 누가 감동하지 않으랴.
성인의 말씀에 ‘마음이 편안하면 띠집도 평안하고 성품이 안정되면 나물도 향기롭다고 하였다(心安茅屋穩 性定菜羹香)’. 요즘 사회, 수백 수천억의 비리가 아니면 변변한 뉴스 축에도 못 끼는 사건이 얼마나 많은가. 몇 백만원, 몇 천만원짜리 수입 양주와 손가방이 불티나게 팔리고, 부모 백에다 투기재산 불린 건달 벼락부자가 어깨 펴고 흥청거리는가 하면 속이 텅텅 빈 패권주의자들이 쥐락펴락 활보하는 꼴불견이 진짜로 저주스러울 뿐이다.
예나 지금이나 부귀는 누구나 탐하는 것이지만 정도로써 얻은 것이 아니면 누리지 말아야 한다. 행복의 주머니에 구멍이 나면 불행은 호시탐탐 찾아드는 것이다. 약속을 생명처럼 여기는 용할머니는 오늘도 떳떳한 인생훈장을 가슴에 안고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갈 것이다.
/수필가·산청문화원 향토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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