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저편 <251>
오늘의 저편 <251>
  • 경남일보
  • 승인 2012.12.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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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생각해도 용진은 어머니처럼 살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아버지의 손을 잡고 세상으로 나아갈 자신은 더욱 없었다. 간밤에는 밤새 가위눌려야 했다. 이렇게 떠나도록 되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 줄 몰랐다.

‘그래, 그런 모습을 절대로 자식한데 보이고 싶지 않으실 거야.’

버릇처럼 되뇌며 용진은 굳이 머리까지 끄덕였다.

스스로 마음을 홀가분하게 조제한 용진은 출국수속을 완전히 끝냈다. 그는 아버지가 생존해 있기 때문에 지금 떠나야 하고 더욱이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하고 있었다.

용진에게 비행기 표를 받은 승무원은 기내 좌석번호를 확인한 후 왼쪽 통로로 가라고 일러주었다. 자리를 찾아 뚜벅뚜벅 걸어가던 용진은 말 못할 설움이 한꺼번에 북받쳐 올라옴을 느끼며 걸음을 멈추었다. 젖고 있는 동공을 눈꺼풀로 달래며 입술을 입안으로 마구 구겨 넣었다.

육중한 쇠붙이가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용진은 손가방을 든 채 비상하는 비행기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 덩치가 점점 작아져 아주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는 그렇게 멍청히 서 있었다.

굴속에 앉아 고요히 마음을 떨어뜨리고 있던 진석은 이윽고 자신의 몸에 불을 붙였다. 어두컴컴하던 토벽에 불빛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진석은 민숙의 영정을 가슴으로 꼭 껴안았다.

용진은 바로 어제 아내의 죽음을 알았다. 집으로 내려갔다가 아내의 영정사진을 본 것이었다. 아들이 갖다놓았다는 것도 바로 알 수 있었다,

느닷없는 아내의 죽음 앞에 그는 울지 않았다. 아들네 갔다가 영정으로 돌아온 아내의 낯선 모습에 감전되어 한동안 넋을 잃고 서 있었을 뿐이었다.

진석은 평생 동안 죽음을 미루곤 해야 했다. 용진이가 중학교에 들어가는 건 봐야 한다고, 고등학교에 들어가는 것도 함께 보자고, 일류대학을 나와 좋은 직장을 구했으니 장가가는 건 꼭 봐야하지 않겠느냐고 그렇게 아내가 꼬드기는 바람에 차마 목숨을 끊을 수가 없었다.

손자 유민을 보았을 때도 진석은 민숙의 갖은 꼬드김에 빠져 죽음을 유예해야 했다. 나중에 진석은 늙어가는 아내를 혼자 남겨두고 떠날 수 없어서 죽지 못했다.

타오르는 불길이 진석을 완전히 휘감았다.

그는 되뇌었다. 아들을 위한 완전한 소멸의식이라고. 나병에 걸려 많은 것을 잃었지만 사랑의 덫에 치인 나날이었기에 행복했다고. 이제 또 아내와 영원한 동행을 시작할 것이라고.

불길 사이로 미소 짓는 그의 모습이 얼핏 보였다.

곧 불덩어리가 된 그는 앞으로 조용히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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